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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670
성명
한자 李舜基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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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3.1 운동 당시 안성(安城) 원곡(元谷)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등을 습격, 파괴하고 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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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양성면(陽城面)·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처음에는 양상면과 원곡면이 별도로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과 원곡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워 버렸다. 다시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은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 온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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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순기 - 경기 안성(安城)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운동
본문
1897년 9월 26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 두 지역의 주민들은 1919년 4월 1일 연합하여 매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에서 먼저 시작된 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만세시위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받고, 이한영(李漢榮)·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 마을주민들과 함께 곧바로 동의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날 저녁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유석·홍창섭 등의 주도자들이 양성면으로 가서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적극 호응하며 시위대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이동하였다. 양성면이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성은고개에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휴식을 취할 겸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은 양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주민들을 격동시키는 연설을 하였다. 이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여 나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굳게 다잡고,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다시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한편, 양성면에서는 밤 9시 경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끝나갈 무렵 원곡면에서 행진해 온 시위대가 합류하였다. 그러자 시위군중은 약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무되었다.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주재소로 행진하여 최은식·이병렬(李炳烈)·이한영(李漢榮)·한응교(韓應敎) 등과 함께 돌을 던지며 주재소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공세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양성우편소와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의 상점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그러자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였고,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혔고,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내란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운동은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며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라고 판결하였고,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방화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증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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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주거침입, 강도, 소요, 전신법위반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1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 징역 2년, 다만 구류일수중 500일을 본형에 산입함 경성복심법원 1921-01-22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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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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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기념관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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