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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洪川郡) 내촌면(乃村面) 물걸리(物傑里), 현재 동창리(東倉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1년 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이었다.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만세운동은 같은 마을에 사는 천도교 장두(狀頭) 김덕원(金德元)이 주도하여, 부장두 전성렬(全性烈)을 비롯하여 이문순(李文淳)·전영균(全榮均)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주도 인물들과 함께 자신의 마을은 물론 인근의 화촌면(化村面)·서석면(瑞石面), 인접한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내면(內面) 등지의 천도교인들을 규합하여 시위 계획을 알리고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물걸리는 영동과 영서의 물화교류의 중심지로, 상설시장이 개설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마을이었다. 주막과 마방이 있었으며, 상업용 창고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물걸리의 지역적 이점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 힘을 썼다.장터에서 약방을 운영하는 전영균의 다락방에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모여 시위를 준비하였다. 여러 지역에 거사 계획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한편, 시위 때 쓸 대형 태극기 3점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소형 태극기 300점도 제작하였다. 의거를 준비하던 주도 인물들은 4월 1일에 홍천면 신장대리(新場垈里) 장터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다음날에는 동면(東面)에서 시위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거사 하루 전인 4월 2일, 이장 김홍이의 밀고로 헌병보조원 홍재호(洪在浩)와 윤모(尹某)가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장터에서 염탐하였다. 김덕원과 전성렬은 소식을 듣고 이들을 만나 비밀을 지켜달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히려 호통을 치며 훈계하면서 거부하였고, 이에 분노한 김덕원과 전성렬은 이들을 창고에 가두었지만, 밤에 탈출한 홍재호 등은 다음날 보복을 준비하였다.4월 3일, 장터는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볐으며, 주도 인물들과 같이 정오 무렵 약속 장소인 전영균의 한약방에 모여 태극기를 걸고 군중들에게 소형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4시경, 전영균·김자희(金自喜), 명 김자선(金自善)·이기선(李基先)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장터 가운데로 향하였다. 이때, 선두에서 징을 울려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전성렬이 사회를, 김덕원이 개회 연설을 하였고, 전우균(全祐均)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문순의 만세 선창에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를 행진하였고, 징 소리에 맞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시위대는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마치고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가 있는 도관리(道寬里)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때 잠복하고 있던 헌병들이 나타나 시위대 앞을 가로막았다. 시위대와 함께 헌병들의 저지를 뚫고 행진하려고 했지만, 홍재호·박연흥(朴連興) 등 7명의 헌병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하였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시위대는 흩어지기 시작하였고, 함춘선(咸春先)·승만수(承萬壽) 등 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자희·이기선·전영균·이순극(李順克)·연의진(延義鎭)·이여선(李麗先)·전기홍(全基弘) 등과 같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광복 이후 김자희·전영균 등과 더불어 물걸리 만세운동에서 사망한 8명에 포함되어 ‘팔열사(八烈士)’로 칭송되고 있다. 현재 물걸리 마을인 동창리에서는 1963년 4월 2일 팔열각(八烈閣)을 세웠으며, 1991년에는 기미만세공원건립위원회에서 마을에 ‘기미만세공원’을 건립하면서 기념비와 기념물을 세웠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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