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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도렴동(都染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1년 당시 51세인 것으로 보아 1871년생으로 추정된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한성(漢城)병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직업이 의사였으므로 1919년 10월 환자 진찰을 위해 신의주에 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원인 신학렬(申學烈)을 만났다. 임시정부가 설치한 교통국 요원들은 군자금 모집 활동, 정보수집과 보고, 지령 또는 서류·선전물 등을 국내 독립운동가 또는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신학렬의 소개로 1920년 4월 8일 서울에서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근거지를 둔 대한청년단연합회 통신부장이자 임시정부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 교통국(交通局) 통신위원 오학수(吳學洙)를 만났다. 오학수로부터 경성교통국 설치를 권유받고, 교통국 설치를 위한 일정을 의논한 뒤 헤어졌다.
1920년 5월 초순 사리원(沙里院) 교통국에서 파견된 정의도(丁義道)를 만나 구체적 업무를 논하였다. 5월 20일부터 종로에 있는 종교(宗橋) 예배당과 홍릉(洪陵) 약수터를 옮겨가며 정의도· 박윤삼(朴允三)·이기하(李起夏), 사리원 교통국원 김이욱(金履郁) 등과 모임을 갖고 경성교통국 설치에 합의하였다.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일진회(一進會) 부회장을 지낸 홍긍섭(洪肯燮)을 국장으로 추천해 선임하고 정의도·이기하와 함께 참사(參事)가 되었다. 그러나 추후 연락을 받은 홍긍섭이 국장 취임을 거절해 경성교통국은 3인의 참사만으로 시작되었다.
경성교통국은 임시로 종교예배당을 거점으로 정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김이욱이 사리원에서 가지고 온 독립신문 400여 장을 은밀히 종로의 미술품 공장 등에 뿌리고,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에서 조직된 독립청년단 총무 김청풍(金淸風)에게서 받은 독립공채·적십자회비 영수증 등을 판매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외에도 임시정부 공보, 신한청년 등을 전달받아 국내에 배포하려고 노력하였다. 6월 27일경 고경상(高敬相)을 교통국원으로 가입시켰다. 인원이 늘어나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기하는 경기도, 정의도는 사리원, 그리고 자신은 서울, 박윤삼은 여러 도(道)를 연락하는 업무를, 고경상은 회계를 담당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서로 서신으로 연락할 경우, ‘상업은 조선독립운동, 매매는 독립신문의 수수배달, 대택(大宅)은 임시정부’로 정한 암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종로경찰서 경찰에게 탐지되어 6월 말경 붙잡혔다.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5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 후 1944년 태평양전쟁 시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이 한국 상륙작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고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미국은 1944년부터 납코작전(The Napko Project),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 북중국첩보작전(North China Intelligence Project) 등을 준비해 한국에 정예 요원을 침투시킬 계획이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이를 예상하고 호응할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활동도 발각되어 1944년 12월 3일 일본 헌병대에 붙잡혔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5월 3일 광복을 불과 석 달 앞두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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