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마산(馬山) 사람이다.
1919년 '1차 유림단사건'(파리장서사건)과 1926년 '2차 유림단사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관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나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활동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로써 김창탁도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후 1926년 3월 그는 김창숙이 모금한 군자금을 중국으로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
당시 김창숙은 파리장서 사건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지역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국내로 들어와, 경남북지역의 유림들로부터 군자금 3,550원을 모았다.
김창탁은 모금한 자금의 전달책임을 맡아 1926년 3월 22일 오전 7시에 마산을 출발하여, 동일 오후 9시 약속 장소인 삼랑진에서 김창숙을 만나 북행열차를 탔다. 그들은 같은 달 26일 봉천에 안전하게 도착하여 군자금이 무사히 전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형법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翁金昌淑一代記(心山事業會) 91·101·108·189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2輯 309·311·319·320·329·332面
- 判決文(1927. 3. 29. 大邱地方法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399·419面
- 騎驢隨筆(宋相燾) 259·264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18面
- 東亞日報(1927. 2. 11, 3. 19)
- 豫審終結決定書(1927. 1. 21. 大邱地方法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