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응집은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해 8월 12일 <국민신보(國民新報)>에 민족의식 고취 내용의 글을 여러 차례 게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8월을 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11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 이후 김응집은 계속해서 민족 독립에 공헌하려고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신간회는 좌우합작의 민족협동전선으로 만들어진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였다. 1927년 11월 7일 김응집은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본부의 준비위원회 서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경성지회의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경성지회사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김응집은 1930년대 초반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申興雨)를 중심으로 박용희·함태영(咸台永)·전필순(全弼淳)·정춘수(鄭春洙)·신공숙(申公淑)·박연서(朴淵瑞)·유억겸(兪億兼)·구자옥(具滋玉) 등 서울 경기지역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초교파 기독교 정신·신앙운동 단체인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에 앞서 1925년 3월 신흥우 집에서 이상재·구자옥 등 기독교 유력 간부 9명이 모여 ‘흥업구락부’라고 하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흥업구락부는 표면상으로는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민 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상은 해외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대어 주는 하나의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김응집도 기독교인으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는 1925년 8월 1일 제5회 열회(列會)에 참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흥업구락부의 운동을 발전시키고자 1932년 6월 중순 서울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기독교 관계자인 신흥우, 김응집 등이 회합하여 적극단을 조직하고자 하였고 1933년 9월 중순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현동완(玄東完) 외 11명이 모인데 이어 그해 10월 신흥우, 김응집 등이 모여 적극신앙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38. 9. 4)
- 在滿朝鮮人通信(1938. 10) 제59호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268~2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집 351·3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314·315·333· 341면
- 思想彙報(朝鮮總都府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1938. 8), 137~139, 143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11. 28)
- 中外日報(1927. 11. 7, 1930. 4.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