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유림들이 주체가 되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세칭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파리장서란 전통 유림들이 1차 대전 직후 국제정세의 분위기가 개조되는 상황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써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137명의 유림이 서명하였다.
전통 유림의 계보로 볼 때 그는 영남 학통의 정맥을 잇는 학자로서, 곽종석·김창숙(金昌淑)·윤충하(尹忠夏) 등과 함께 파리장서운동의 실질적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그는 곽종석의 지시에 의해 서울로 올라가 김창숙과 함께 정세를 파악하면서 파리장서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파리장서 운동을 시작할 때, 이들은 서명한 인사들이 모두 체포 투옥된다 하더라도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중심 인물 가운데 일부는 서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때 김우림도 김창숙 등과 함께 제2진에 포함되어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이 일이 발각된 뒤에 일제의 검거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단성헌병대(丹城憲兵隊) 유치장에 구금된지 7일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1926년 초 김창숙이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할 때 서로 연결되어, 산청(山淸)·진주(晋州)·의령(宜寧)·거창(居昌) 등지의 유림을 대상으로 연락과 군자금 모집의 책임을 맡았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 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우림은 곽종석의 문집(文集)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경남 지방의 부호들인 조현규(趙顯奎)·하영진(河泳鎭) 등에게 군자금 1만 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이길수(李吉洙)로부터 6백 원의 자금을 수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일이 발각되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 그는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고, 일제가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등 민족적 지조를 지켜 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문조서
- 예심종결결정서(1927. 1. 21 대구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84·28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3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22∼930면
- 벽옹김창숙일대기(심산사업회) 173·174·201면
- 을미일기(김우림 자필일기)
- 중재선생년보(필사본)
-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약사(파리장서비건립위원회, 1973) 21·25·28·44면
-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78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