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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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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明濟世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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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1919년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수립(樹立)(後) 내무총장(內務總長) 이동녕(李東寧)주도(主導)임정(臨政)옹호(擁護)독립운동 지원(獨立運動支援)을 위하여 상해(上海)에서 불변단(不變團)조직(組織)할 때 총무(總務)가 되었으며 그 (後) 천진불변단장(天津不變團長)으로 활동(活動)하는 한편 임정 국내특파원(臨政國內特派員)으로 임명(任命)되었고 박은식(朴殷植) 안정근(安定根) 등과 함께 제2의 독립선언(獨立宣言)발표(發表)하였고 1920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 내한시(來韓時)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한훈(韓焄) 김동순(金東淳) 윤익중(尹益重) 등과 조선총독 주살(朝鮮總督誅殺)기도(企圖)하여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3년을 받았으며 1922년부터는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조직(組織)하여 국산품 애용운동(國産品愛用運動)에 앞장섰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발기인(發起人)중앙위원(中央委員)으로 선출(選出)되어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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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평북 영변(寧邊) 사람이다. 1919년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사무총장 이동녕(李東寧)이 임시정부의 옹호와 독립운동 원조 목적으로 중국내에 있는 한국 청년을 규합하여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할 때 총무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19년 4월 18일 천진불변단(天津不變團)으로 확대조직되자 부단장이 되고 동년 8월 15일 조직개편시 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25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에서 국내의 독립운동 지도와 임시정부의 선전 및 정보보고 등을 목적으로 국내특파원제를 실시할 때 경원선(京元線) 일대를 담당하는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민족적 단결을 호소하고 일제에 대한 항쟁을 천명한 제2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박은식(朴殷植)·안정근(安定根)·도인권(都寅權)·박항(朴恒) 등 30여명과 함께 발표하였다. 1919년 10월 서울에서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거사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을 때 1920년 1월 30일경 임시정부 요인 안창호(安昌浩)를 중국 상해에서 만나고 서울에 돌아온 조만식(曺晩植)과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협의, 추진하다가 일경에게 사전탐지되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동양시찰을 목적으로 중국을 거쳐 방한(訪韓)함을 계기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기 위하여 조선총독의 주살을 도모하고 대한광복단원(大韓光復團員) 한훈(韓焄)·김동순(金東淳) 등과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겨울 연희전문학교생(延禧專門學校生) 염태진(廉台鎭)·박태화(朴泰和)등 50여 명이 주동이 되어 자작회(自作會)를 조직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이자 이 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하여 1924년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결성하고 1934년 4월 27일까지 중앙회 이사 및 경성지회(京城支會) 이사장 등으로 선출되어 기관지로 《신조선(新朝鮮)》을 간행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초에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1927년 2월 14일 신간회(新幹會) 창립준비시 민흥회측 위원으로 권동진(權東鎭)·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발기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여하여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241·242·243·30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0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717·75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1輯 106∼11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292·293·357·358·359·361·362·363·367·468·753面
  • 東亞日報(1921. 6. 19, 6. 26, 10. 28, 11. 16, 1925. 10, 5)
  • 朝鮮日報(1927. 2. 14, 1930. 4. 17)
  • 朝鮮民族運動年鑑 41·42·63·64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402·818·855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37·38面
  • 宣言書(1919. 10. 31 大韓民族大表 30人 名義)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735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47·48面
  •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39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91·92·203·204·205·233·364·36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297·298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0輯 1047面
  • 豫審終結決定書(月日未詳)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명제세 - 평북 영변(寧邊) 함경북도 연통제 사건, 암살단 사건
본문
1885년 2월 4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봉산면(鳳山面) 망일리(望日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서촉(西蜀)이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수학하였다.연해주에서 귀향한 뒤 『대한매일신보』 영변지사원으로 1909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중국과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0년대 톈진(天津)으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톈진에서 불변단(不變團)을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 창립 당시 부단장을 맡았으며, 그 해 8월 15일 의사부를 신설하고, 군무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개편하고 임원을 개선할 때 단장을 맡아 부단장 박환, 군무부장 신명화 등과 조직을 이끌었다.1919년 8월 25일 서울과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는 경원선 연변(沿邊)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이와 함께 재무부장 독고감과 부단장 박환, 초대 단장 조선홍도 국내로 파견되어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면서 연통제 설치에 앞장섰다. 또 임시정부와 함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면서 10월 31일 박은식이 기초하여 발표한 ‘대한민족대표’ 30인 명의의 독립선언서에 불변단 부단장 박환, 초대 단장 조선홍, 초대 서무부장 박세충, 초대 총무부장 김철 등과 불변단 단장 자격으로 이름을 올렸다.서울 관철동 조선여관에 자리를 잡고 1919년 9월 연통제 함경북도 감독부 설치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에는 함경도와 경기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이종욱과 이강(李堈) 공의 중국 망명 시도를 도왔다.10월 31일 일왕의 천장절 축일을 기화로 자동차로 서울 시내를 돌며 ‘대한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서와 ‘남녀학생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의 포고문을 살포하고,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봉기를 꾀하였다. 정보 유출로 3월의 만세운동처럼 대대적으로 봉기하지는 못하였지만,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의주·선천·정주영변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이후에도 조선홍 등 불변단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재차 만세운동을 모색하였다. 1920년 1월 조선홍은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와 만나,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키로 의견을 모았다. 2월 국내로 돌아온 조선홍과 협의하여 동지로 포섭한 류연원의 친족 장례식을 계기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일 용산정거장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배객과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상하이로부터 우송되는 선언서와 격문 등이 발각되고 주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봉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공채가 도착하자, 조선홍·최영만 등과 1920년 5~6월 서울의 부호 박승빈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이 과정에서 암살단을 조직 활동하던 김동순·한우석·김상옥 등과도 연계하여, ‘대한독립군사령부’를 조직하여 연대 투쟁을 도모하였다. 다시 박승빈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이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계획하였다. 불변단원들과 취지서와 경고문의 인쇄와 배포를 맡았고, 김동순·김상옥·한우석 등 암살단원은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맡았다. 그러던 중 거사 직전 한우석을 비롯한 암살단원과 함께 붙잡혔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4년 출옥 후 조선물산장려회에 들어가 1940년 해산 시까지 중앙회 이사와 서울지회 이사장을 지냈다. 한편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 대표로 사회주의운동 단체인 서울청년회와 합작하여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 발기인으로도 참가하였다.1945년 8월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한국독립당 중앙위원·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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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공문서위조, 공갈취재미수, 사기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친다 경성지방법원 1921-06-2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위반, 사기 징역 3년, 미결구류일수중 30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21-11-15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공갈, 보안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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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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