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4.8 부산진공립보통학교 (釜山鎭公立普通學校) 재학시 (在學時) 동교생 (同校生) 김애련 (金愛連) 전호봉 (全浩鳳) 과 함께 주동 (主動) 이 되어 일신여학교생 (日新女學校生) 50여명 (餘名) 과 인근주민 (隣近住民) 수백명 (數百名) 을 규합 (糾合) 하여 독립만세 시위 (獨立萬歲示威) 를 전개 (展開) 하였으며 주동 인물 (主動人物) 들이 일경 (日警) 에게 피체 (被逮) 되자 육박전 (肉薄戰) 으로 이에 대항 (對抗) 하며 구출 (救出) 을 시도 (試圖) 하다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주동자 (主動者) 로서 미결기간 (未決期間) 을 합산 (合算) 하여 11월 12일간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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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 좌천동(佐川洞)에 거주하였으며 부산진공립보통학교(釜山鎭公立普通學校) 학생으로 이곳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8일 오후 8시경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출신인 김애련(金愛連)·전호봉(全浩鳳)과 함께 주동이 되어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학생 50여명과 인근주민 수백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출동한 일경에게 육박전으로 대항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부터 1929년 10월 26일까지 조선방직회사(朝鮮紡織會社)에 전기공으로 근무 중 작업방해목적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고압 동력선을 절단코자 하다가 밀고로 이 회사의 일인 전기주임에 의해 감전 살해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除籍謄本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194·195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