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919년 사이에 충남 (忠南) 논산군 (論山郡) 양촌면 (陽村面) 에서 육영학교 (育英學校) 를 설립하여 항일 의식 (抗日意識) 을 고취 (鼓吹) 하며 민족 교육 (民族敎育) 을 실시하였고 1922년 독립군자금 (獨立軍資金) 조달 (調達) 을 목적 (目的) 으로 장남 (長男) 김영한 (金永翰) 등으로 하여금 위조지폐 (僞造紙幣) 를 제조토록 하여 반출직전 일경 에게 탐지되자 1923년경 (年頃) 활동 근거지 (活動根據地) 를 중국 (中國) 동삼성 (東三省) 으로 옮겨 영안현 (寧安縣) 영고탑 (寧古塔) 지역 등에서 대종교인 (大倧敎人) 으로서 1925년 사망 (死亡) 할 때까지 독립운동 (獨立運動) 을 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논산군 양촌면(陽村面) 소재 배양학교(培養學校)를 1911년 4월에 인수해서 육영학교(育英學校)를 설립하여, 1919년 총독부령(總督府令)에 의해 육영학교가 양촌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될 때까지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꾸준히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독립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위조 계획을 세우고 인쇄기술자 김명섭(金明燮) 등으로 하여금 위폐를 인쇄토록 한 후 장남 김영한(金永翰) 등을 통해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반출시키려 했으나, 반출 직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실패하고 간도(間島)로 탈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 등지에서 대종교(大倧敎)인으로서 윤세복(尹世復) 등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4년에는 가재를 정리하여 가족을 모두 중국의 하얼빈〔哈爾濱〕 근교 황산저자(荒山咀子)로 이주시켜 농장 건설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5년 9월 길림성 아성현(阿城縣)에서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3. 12. 27 전주지방법원)
- 제적등본
- 양촌국민학교 연혁지(논산군 교육장, 1990. 2. 17)
- 이임희유고(김조현의 자부, 1981.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