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전남 고흥(高興) 사람이다.
1907년 1월 1일 송남섭(宋南燮)과 더불어 양회일(梁會一)을 만나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상의한 후 향리로 돌아와 격문을 뿌려 수백명을 모집한 뒤 1909년 4월에 사창호곡(社倉毫谷)에서, 8월에는 과역전투(過驛戰鬪)에서, 1909년말 유둔만전투(油屯萬戰鬪)에서 적 다수를 사살하였으며, 1910년초 돌산전투(突山戰鬪)에서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고 한다.
1909년 3월에는 휘하 의병 3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흥양군(興陽郡) 대강면(大江面)에서 활동하면서 흥양군 남양면(南陽面) 하와리(下臥里)에서 엽전 239냥을 모금하고, 동년 3월 20일 남면(南面) 송천리(松川里)에서 14원 60전을, 5월 10일에는 서면(西面) 남양리(南陽里)에서 엽전 100냥을, 남양면(南陽面) 거군리(巨君里)에서 백미(白米) 1석을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1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은 후 1912년 12월 14일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1914년 5월 24일 소위 칙령(勅令)으로 징역 5년 8월로 형이 변경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0. 1. 25 광주지방재판소)
- 호남절의록(1964. 5. 12)(金晟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