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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8월 9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종암리(鍾岩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신경구(申敬求)·이수란(李水蘭) 등과 함께 미원면 미원리의 미원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0일부터 31일까지 미원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청주군 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신경구는 3월 23일 청주군 강내면(江內面)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었다. 그리고 신경구는 충남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 현 세종특별시 조치원읍)의 김재형(金在衡)이 김재석(金在石)을 통해 미원면에 배포한 독립선언서를 읽은 후, 미원면에서도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신경구로부터 만세시위를 함께 추진하자는 제의를 받고, 적극 찬성하며 이수란과 함께 거사 계획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는 미원장터의 장날인 3월 30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30일 오전 미원장터 인근에 위치한 김태복(金泰復)의 집에서 신경구·이수란과 만나 최종적으로 만세시위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이어서 담뱃대에 신봉휴(申鳳休)가 만든 태극기를 매달고, 오후 2시경 미원장터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를 들어 올리고, 장터의 사거리에서 신경구와 함께 주변의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그러자 이에 공감한 1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였고, 신경구·이수란과 함께 이들을 지휘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미원헌병주재소 헌병들은 이러한 상황을 접수하고 곧바로 출동하였다. 그리고 헌병군조(憲兵軍曹) 우에다 리노스케(植田利之助)와 헌병 8명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며 즉각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시위대를 지휘하며,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더욱 많은 주민들이 동참해 시위대의 규모는 1,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더욱 확대되어 즉각적인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제 헌병들은 우선 신경구 등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인물들을 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1,500여 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주재소로 달려가서,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이때 이수란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솔선하여 주재소로 쳐들어가 옷을 풀어헤치고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외치며, 소지한 담뱃대를 휘둘러 주재소장을 구타하였다. 윤인보(尹仁甫)는 맨손으로 일제 헌병의 대검을 빼앗으며 저항하였고, 성규원(成奎垣)은 일제 헌병들에게 “어째서 시위 군중을 살상하는가”라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럼에도 주재소장은 연행자 석방 요구에 불응하고, 주재소에서 주도자의 체포를 규탄하던 이수란·성규원·윤인보 등을 다시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제 헌병의 강압적 태도에 더욱 분노하여 시위대를 향해 “주재소를 파괴하라”·“주재소장을 죽여라”라고 외치고, 앞장서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진 후 시위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이에 따라 시위대는 일제히 돌을 던지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주재소 유리창과 장지문 등이 파손되었고, 주재소 정문 기둥과 담장이 붕괴되는 등 각종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재소장이 연행된 사람들을 풀어주지 않자, 시위대를 지휘해 주재소장과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주재소 헌병만으로 시위대의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주의 헌병들을 지원 병력으로 파견하였다. 미원장터에 도착한 파견 병력들은 곧바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에게 이수란 등과 함께 붙잡혀 조사를 받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실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방해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받았지만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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