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중국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출판사를 설립하여 제국주의 반대 투쟁을 전개하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치정은 1927년 2월 중국 무창(武昌)으로 건너가 김원봉·유자명 등과 교유하면서 유악한국혁명동지회(留鄂韓國革命同志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유악한국혁명동지회는 1927년 초 중국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무한한인청년회’라고도 불리웠고, “우리들은 한국 민족혁명 및 사회혁명을 완성한다”, “우리들은 세계 혁명군중과 연합하여 세계혁명을 완성한다”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중국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武漢分校) 개교 시에는 무한분교초고위원회(武漢分校招考委員會)의 의뢰에 따라 한인청년들을 모집하여 입교시켰다. 1928년 말 광주 봉기 직전 무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청년들이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무한분교를 졸업한 김치정은 1929년 1월 이래 중국국민당 정부 직할 상해비행창(上海飛行廠)에서 육군 중위로서 근무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중국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
1930년 1월 경 중국 상해에서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간 김치정은 그해 12월 정세파악을 위하여 국내에 들어와 평안남도와 그 밖의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朝鮮共産黨再建鬪爭協議會)를 결성하였다. 김치정은 출판물을 통한 노동자·농민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임무라고 생각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원고검열 등으로 출판활동이 용이하지 못하였다. 1931년 2월 김치정은 ① 일본에 계몽적 출판사를 조직할 것 ②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를 결성할 것 ③ 일본공산당과 연락하여 그 지지 원조를 받기위해 노력할 것 등의 임무를 띠고 일본 동경으로 다시 건너갔다. 1932년 1월 1일 일본에서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으며, 1932년 5월 조선공산당재건투쟁위원회 일본출판부를 결성하고, 일본공산당 중앙부원과 연락하여 일본공산당의 지지를 얻었다.
김치정은 그해 8월 다시 귀국하여 전국을 중부, 영남, 호남, 관서, 관북의 5개 지방으로 나누고 산업도시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치던 중 1932년 11월 9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3년 3월 4일 기소되었다. 김치정은 5년간 예심에 회부되어 가혹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신음하다가 1935년 10월에 형집행 정지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극도로 신체가 쇠약하여 영양부족으로 1936년 2월 7일 사망하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と日本のあいだ(金三奎, 1980) 25~33면
- 思想彙報 第6號(1936. 3) 177~192면
- 東亞日報(1936. 2. 21)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 1994) 166~167면
- 資料 韓國獨立運動(秋憲樹 編, 1972) 제2권 2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집 433면
- 近代日本社會運動史人物辭典(日本アソシエ-ツ) 제2권 366면
- 豫審終結決定書(東京刑事地方裁判所:1935. 10. 14)
-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朴慶植) 第2卷 65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3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