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재봉은 1907년 7월 서울에서 윤이병(尹履炳)이 주도한 동우회(同友會)에 참여하여 고종(高宗)의 양위(讓位)와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
동우회는 1907년 6월 한일(韓日) 양국의 국조(國祖)를 숭경(崇敬)하여 국가 도덕의 기초를 밝히고 아울러 교육(敎育)·자선(慈善)·식산사업(殖産事業)의 발달을 꾀하고 한일 국민의 정신적 화충협동(和衷協同)의 실(實)을 거두고자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회장에는 이윤용(李允用)과 일본인 도진공희(到津公凞), 부회장에 윤이병·이범규(李範圭) 등을 두고 서울 오부(五部)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의 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이 현실화되자 분개한 동우회원들이 항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회장 이윤용과 부회장 이남규는 구차스러운 이유를 내세워 사임하였다. 동우회는 윤이병과 김재붕을 각각 회장과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회의 취지도 ‘황실존중’, ‘청년교육’, ‘동양평화’의 세 가지 목적을 표방하며 조직을 일신하였다. 동우회 취지에 찬동하여 가입한 회원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 무렵 신문에는 고종의 양위 및 일본행, 조약 체결에 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이에 동우회는 이를 저지하고자 동년 7월 18일~19일 동우회 회관에서 특별회를 연속 개최하고 항쟁의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고종에게 올릴 상소를 준비하고자 종로의 포전도가(布廛都家)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만민공동회만인소청(萬民共同會萬人疏廳)’이란 간판을 게양하고 항쟁 준비를 하였다. 그 무렵 윤이병은 종로에서 남대문 정거장으로 가서 고종의 일본행을 저지하자고 대중 연설을 한 후, 군중을 이끌고 대한문(大漢門)과 포덕문(布德門)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경관들이 제지하자 투석전을 펼치며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런 와중에 고종의 일본행은 와전(訛傳)된 것이고, 양위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에 이들은 다시 동우회 회관에 모여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는 모임을 이튿날 갖기로 결의하였다.
7월 20일이 되자 동우회원 및 민중 수천 명이 석고단(石鼓壇)에 모였다. 윤이병이 앞으로 나와 ‘남대문 정거장에 모였다가 대가(大駕)가 임어(臨御)하면 궤도에 엎드려 항쟁하다가 환어하면 만행이고 만약 그래도 끝까지 출어하면 궤도에 역사(轢死)하자’고 연설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도 연설하여 중론이 분분하였다. 이때 한 회원이 등단하여 ‘이 같은 사태에 함몰(陷沒)케 한 자는 적신(賊臣) 각원들임으로 매국(賣國) 대신들을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하나 현재 대신들이 입궐하여 곧 목적을 이루기 곤란하므로 먼저 총리 이완용(李完用)의 집을 방화하자’고 연설하였다. 군중들은 이에 동의하여 곧 결사대를 조직하고 강태현(姜泰鉉), 송영근(宋榮根)을 대장으로 추천하였다. 이들은 즉시 서소문 밖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방화, 소각하며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김재붕은 동우회 부회장으로 이 항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형(流刑) 10년을 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제1권 209~213면
- 高宗時代史(國史編纂委員會) 제6권, 1908년 1월 16일
- 皇城新聞(1908. 1. 24)
- 純宗實錄(1908. 1. 16)
- 日省錄(1908. 1. 16·1. 22)
- 判決書(平理院:1907. 12. 29)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44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