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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40
성명
한자 梁振汝
이명 梁振如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0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호남(湖南) 의병장으로 대치산(大峙山)에서 일본수비대와 교전하고 연합부대의 일익으로 추월산(秋月山)에서 일군교전하는 등 혈전을 전개하여 피아(被我)손해(損害)가 많었으나 의병진의 용명을 떨쳤고 적의 형장에서 순국한 공적이 있으므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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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해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해산군인인 아들 양상기(梁相基)와 더불어 봉기하였다.

1908년 7월 20일경(음력)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박성일(朴聖一)·김익오(金益五)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여 군수를 조달하였다.

대체로 광주·창평(昌平)·나주(羅州)·장성(長城)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중순 광주군 대치산(大峙山)에서 일본 수비대와 혈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1월 24일 일대의 의진과 연합하여 부하 3백여 명을 인솔하고 추월산(秋月山)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어서 1909년 의병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판열(姜判烈) 의진과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270명과 함께 장성(長城)·담양(潭陽)을 습격하고 이어 일군의 본거지인 광주를 공격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이미 광주에는 이에 대비하여 대병력을 배치한 후였으므로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09년 8월 26일 전라남도 장성군 갑향면 향정(香亭)에서 적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5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5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08면
  • 판결문 (대구공소원 형사부 1910. 3. 5)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8·621·6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5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양진여 자 : 진여(振汝), 호 : 서암(瑞菴), 휘 : 진영(振永), 이명 : 진여(鎭汝) 전남 광주(光州) -
본문
1860년 5월 11일 전남 광주군(光州郡) 서양면(瑞陽面) 이동(泥洞)에서 양석진(梁錫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이명은 박여진(朴汝鎭), 아명은 석환(錫丸), 휘는 진영(振永), 호는 서암(瑞菴)이다. 자는 진여(振汝)인데, 진여(鎭汝)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어려서 전남 능주(綾州)의 유학자로부터 유학을 배워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정치적 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주막(酒幕)을 열고서 길손들의 시국담을 귀담아 들었다. 1907년 정미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의 관직을 차지하며 실권을 휘두르자 국가적 위기가 눈앞에 닥쳤음을 인식하였다. 당시 신문에 실린 내용을 전해준 손님들과의 대화에서 큰 감동을 받고서 지금 당장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친일 정부의 구축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리들을 처단하고 전국 각지에 이주한 일본인들도 쫓아내려고 결심하였다.1908년 7월 시국 상황을 살필 목적으로 운영하던 주막을 닫고 본격적으로 거병 준비에 들어갔다. 스스로 의병을 모으는 광고(廣告) 5장을 작성해서 광주군 곳곳에 부착하였다. 1908년 (음)6월 22일 광주군 삼각산(三角山) 죽청봉(竹靑峰)에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약 30명이 약속 장소에 모이자,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의 임용 반대와 친일 정부의 전복, 일본인 이주자 구축 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연설을 마치고 의병장에 추대된 후 300명 규모로 의병을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각자 가져온 화승총 25정을 바탕으로 의병의 초모(招募)와 무기 조달에 힘쓰며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여 의병 규모를 약 100명으로 확대하였다. 원래 목표는 300명을 규합하여 정예 의병으로 양성한 다음, 전국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친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일본 제국주의세력을 물리칠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를 통해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감행된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을 재추진하고자 하였다.1909년 8월 26일 의병 활동 중 얻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던 중, 일제의 군경 합동작전에 의해 붙잡혔다. 일본군의 기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으나 한국인 순사와 통역이 그를 알아보고 붙잡았다. 은신했던 집은 울창한 대숲에 둘러싸여 있고 외부 공격에 대비하여 대문이 두 개나 되었다. 당시 아내를 불러 “자기는 거병 당시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해 진력(盡力)한 것이므로 지금 죽어도 결코 여한이 없다. 내가 죽은 후 큰 아들 상기는 의병으로서 지금 전투 중에 있으므로 둘째 아들로서 가업을 잇게 하라”는 취지로 유언하였다.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에서 이른바 내란죄 등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그 해 4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같은 해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강도 원판결 취소 교(絞) 대구공소원 1910-03-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강도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0-04-1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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