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해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해산군인인 아들 양상기(梁相基)와 더불어 봉기하였다.
1908년 7월 20일경(음력)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박성일(朴聖一)·김익오(金益五)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여 군수를 조달하였다.
대체로 광주·창평(昌平)·나주(羅州)·장성(長城)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중순 광주군 대치산(大峙山)에서 일본 수비대와 혈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1월 24일 일대의 의진과 연합하여 부하 3백여 명을 인솔하고 추월산(秋月山)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어서 1909년 의병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판열(姜判烈) 의진과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270명과 함께 장성(長城)·담양(潭陽)을 습격하고 이어 일군의 본거지인 광주를 공격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이미 광주에는 이에 대비하여 대병력을 배치한 후였으므로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09년 8월 26일 전라남도 장성군 갑향면 향정(香亭)에서 적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5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5월 30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08면
- 판결문 (대구공소원 형사부 1910. 3. 5)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8·621·6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5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