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익하는 1908년경 구한국(舊韓國)의 인장을 위조한 죄로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에서 징역 5년에 처해져 3년간 복역하였다. 71세의 나이에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의 노인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대동단(大同團, 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기타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 8월경부터 제2독립선언서 낭독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 총재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등,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독립만세운동을 단행할 계획을 세웠다.
김익하는 1919년 11월 초순, 서울에서 대동단원(大同團員) 이신애(李信愛)로부터 독립운동의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 동참하고, 김상열(金商說)·이종춘(李鍾春)·이겸용(李謙容)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거사 당일 이신애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장춘관(長春舘)으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고, 김상열·이종춘과 함께 장춘관으로 갔다. 오후 5시를 기해 이곳에서 대표자 전부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김익하를 포함하여 참석한 사람은 조형구(趙炯九)·정설교(鄭卨敎) 등 총 5명 뿐이었다. 이들은 오후 12시까지 동지들을 기다리다가 해산하였다.
한편 나창헌·안교일·정규식(鄭奎植)이 선언서 3,000매를 각각 인쇄, 오후 5시를 기해 자동차 3대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시내에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사전 정보를 입수한 일경에 의해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김익하는 1919년 12월 3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고, 1919년 1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와 신문을 받았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6집 2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집 445~4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집 870~879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0. 12. 7)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200~203, 230, 231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5집 252~253, 352~353면
- 경성시내의 불온상황 추보(1919. 12. 9)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