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그는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여 대학·중용·논어·주역 등에 조예가 깊었다. 1910년 국권피탈시부터 독립을 염원하였고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독립이 되는 시기를 기다리며 오로지 한학연구에 몰두하였다. 주역(周易) 하도낙서(河圖洛書)에 표현된 '상극(相剋)·상생(相生)'의 이론에 의하여 가까운 장래에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운명에 있다고 단정하고 이러한 기회가 올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1928년 2월부터 임교재(任敎宰)와 함께 대전에 남일무역상회(南一貿易商會)라는 곡물상을 경영하면서 오석근(吳錫根)·서현근(徐鉉根)·엄영섭(嚴英燮)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들은 1930년 5월 예기(禮記)에 나오는 '대도무명(大道無名)'이란 글귀를 인용하여 '무명(無名)'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울에 자신이 경영하는 대성원(大聖院) 총지부를 대전에 설치하고 동지규합에 나섰는데, 이는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대도(大道)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30년 8월부터는 남일상회(南一商會)라는 곡물상을 경영하면서 조직원 확보에 진력을 다하였다. 당시 남일여관은 송구용이 350원, 오석근이 50원, 임교재가 2,500원을 출자하여 공동경영하면서 김연화(金蓮華)·서정순(徐貞順)·우일모(禹一謨)·오하영(吳河泳)을 무명결사에 가입시켰다.
1937년 7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가까운 장래에 상생의 세상이 되고 조선독립의 행운이 도래할 시기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국제관계는 일본에 불리하게 되고 만주사변의 종국을 맞게 되어서는 일본은 소련과 개전하기에 이를 것이며, 병력·재력 모두 피곤해져 일본은 결국 패전하여 국내에 혁명이 발발하는 것은 필연의 귀결이다. 이 때는 우리 동지들이 봉기하여 조선의 독립이란 본 뜻을 관철할 절호의 호기로 삼아야 한다. 또 1938·39년에 전쟁이 있고, 1940·41년에 우리 동지가 궐기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1942·43년에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여 조선민중은 행복한 생활을 경영할 수 있다' 라고 예언하고 이를 선전하였다. 그는 만주사변을 무명결사의 목적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활동을 하였으며, 1938년 5월 대성원의 본부를 대전으로 옮기고 조선 각지에 총지부 7개소, 지부 20개소를 두었으며 7,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極秘 日本의 韓國侵略史資料叢書(國學資料院, 1991) 717面
- 昭和十三年後半期朝鮮思想運動槪況(朝鮮軍參謀本部, 1939)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349面
- 每日新報(1940. 10. 5)
- 豫審終結決定書(大田地方法院, 1940. 4.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