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경남 양산농민조합운동(梁山農民組合運動)에 참여하여 투쟁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양산군(梁山郡) 양산면(梁山面)에서 1931년 4월경 변한준(邊翰俊)·김용호(金龍浩)·박영환(朴英桓)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하였고, 사회운동가 전병건(全秉健)이 그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다.
1931년 10월 25일 양산농민조합은 소작료액을 4할로 하고 지세를 지주부담으로 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지주에게 요구하며 점차 소작투쟁을 표면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1932년 2월 24일 양산면 남부동(南部洞) 사회단체회관에서 양산농민조합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전병건이 집행위원장이 되어 소작료 4할 감액 및 소작권 확립 등을 결의하고 농민운동을 위해 소년부·청년부 등을 설치하였다. 1932년 3월 16일 정기대회 후 수백명의 조합원들이 읍내 주변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자, 양산경찰서에서는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기주(李基周) 등 주동자 16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다음날인 17일 부산형무소를 이송될 예정이었다.
이때 전병권의 지시를 받은 그는 김외득(金外得) 등과 함께 각 리 조합반장 등 조합원들을 동원하여 구금 인사의 석방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김외득과 함께 전산리(田山里)의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 등은 집결한 군중에게 일제 경찰이 이유없이 농민들을 구속한 뒤 석방하지 않는다고 연설하면서 석방 촉구 집회를 주도하였다. 이어 소년부 50여 명과 함께 제2차 습격단을 조직하고 17일 새벽 양산경찰서 유치장을 습격하여, 구금 인사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양산경찰서 병력을 포함해 도경찰부와 부산경찰서에서 파견된 70여 명의 일제 경찰에 의해 시위대원 47명 모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思想月報(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1932) 제2권 제12호 21∼30면
- 東亞日報(1932. 3. 20·4. 8)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