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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145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慶喜
이명 金敬姬, 金敬喜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가족관계창설일 2023-02-17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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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16년 평양(平壤)에서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敎師)로 재직중 학생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면직된 후 1919년 삼일운동이 전개되자 여자운동원의 항쟁을 지도하다가 일경의 검거를 피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7월말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부인회(婦人會)를 조직하고 8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군자금(軍資金) 모집에 전력하던 중 병을 얻게 되자, 군자금을 상해(上海)의 동지에게 송금한후 부회장에게 부인회의 일을 위임하고 병사(病死)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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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에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비밀결사 송죽회는 숭의여학교 출신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비밀결사로서 점조직에 의한 절대 비밀을 유지해 갔다. 이들 송죽회 회원들은 전국 각처의 여학교에서 교편은 잡으며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는데, 그는 배일혐의로 1916년 일제에 의해 면직당하였다. 면직 후 그는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의식 고취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평양에서 기독교회 여성들을 주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가하던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9년 7월에 비밀리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비밀결사 부인회(婦人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부인회는 회원의 규모가 8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조직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렇듯 부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그는 병을 얻어 1919년 9월 19일에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58·118면
  • 독립신문(1919. 10. 2, 10. 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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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경희 김경희(金敬喜), 김경희(金敬熙) 평안남도 평양(平壤) 3.1운동, 애국부인회 사건
본문
1888년경 평안남도 평양(平壤)의 개신교 집안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김경희(金敬喜, 金敬熙)라는 이명이 있다. 1908년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경 전남 목포(木浦)의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3년에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黃愛施德), 같은 학교 졸업생 안정석(安貞錫) 등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 일명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송죽회는 숭의여학교 출신과 교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 비밀결사로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과 지원, 망명 지사들의 가족 돕기, 회원들의 실력 양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이 단체는 약 20명의 창립회원을 송(松) 형제라 하여 핵심 회원으로 삼고, 그 밑에 죽(竹) 형제라는 하부 단위를 둔 이원적 조직이었다. 회원은 월 회비 30전을 납부하도록 하였고, 매주 1회 기숙사에서 기도회 형식의 비밀 회의를 하고 토론회 등을 통하여 항일 의식을 배양하였다. 이후 숭의여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황애시덕은 서울을 중심으로, 안정석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다. 회장으로서 조직의 비밀 유지를 위해 신입 회원의 가입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점조직으로 운영하여, 끝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에 발각되지 않고 유지하였다. 이후 송죽회 회원들은 전국의 여학교에서 교편은 잡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전파하였다. 1916년 지리 수업 시간에 하얼빈 지명이 나오자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강의를 한 것이 탄로나 배일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풀려났다. 이때 폐질환을 얻어 평생을 고생하였다. 일제의 강요로 학교에서 면직당한 후 평양 서문밖 교회 권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하순경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가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자 그녀에게 여러 동지를 소개해주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송죽회를 이끌고 기독교회 여성과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주동자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평양의 동지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9년 7월 평양 숭실학교 학생 김정목(金鼎穆)과 함께 비밀리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평양에서 비밀결사 부인회(婦人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폐질환이 재발하여 1919년 9월 19일 사망하였다. 유언으로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훗날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 주십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 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독립신문』에서는 “애국심의 화신”이라 표현하며 죽음을 애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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