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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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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河洛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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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2 훈격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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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896년 경기 의병진(京畿義兵陣)도지휘(都指揮)군사(軍師)로서 광주 장항 전투(廣州獐項戰鬪)에서 왜병(倭兵) 100여명(余名)사살(射殺)하고 이어 남한산성(南漢山城)포진(布陣)하여 왜적(倭敵)을 물리치다가 마침내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안동(安東), 의성(義城) 등지(等地)에서 10여차(余次)에 걸쳐 격전(激戰)을 치루다가 분전(奮戰) 순국(殉國)하여 초기 의병기(初期義兵期)귀감(龜鑑)으로서 현저(顯著)한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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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의성(義城) 교촌(校村) 출신이다.

그는 단발령 직후 즉 을미년 11월부터 병신년 7월 순절할 때까지 제1차 의병전쟁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그 활동 상황 및 의병전쟁 전개과정을 기록한 진중일기(陣中日記:「金河洛陣中日記)」를 남겼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거사할 계획으로, 그는 이종제인 조성학(趙成學)·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이튿날 새벽에 몰래 한강을 건넜다. 17일 이천(利川)군에 들려 화포군 도영장(火砲軍 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들여 포군 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일 백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대로 나누어 우선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당시 의병을 조직하여 거사하고자 하는 사람의 첫 과제는 화포를 다룰 줄 알거나 그것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의병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막강한 무력을 갖춘 일본군(日本軍)이거나 이제 막 제복을 갈아입고 신식 소총을 멘 개화군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개화군이 연약하기는 하였지만, 일본군 장교가 무기 사용법과 사격술 그리고 작전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었고, 활·창·칼 심지어 맨손으로 싸우는 의용군이었다. 이처럼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을 확보한 김하락은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지평(구연영), 광주(조성학), 안성(김태원), 음죽(신용희) 등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초모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창의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연합하여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에 민승천을 이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김하락은 각군 도지휘(各軍都指揮)가 되어 안옥희(安玉熙)와 안재흥(安載興)을 종사(從事)로 삼았다. 그리고 삼기구대(三騎九隊)의 법에 따라 항오를 편성하였다. 점차 의병들의 사기가 충천하고 형세가 번창하자, 12월 3일 일군은 수비대 보병 백여 명을 파송하였다. 의병들은 그 무기에 결정적인 취약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다. 이런 이중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전법이 필요하였다. 김하락은 이 점을 재빨리 파악하여 대장에게 복병전을 전개할 것을 건의·채택되었다. 전군을 나누어 복병 시켜 대적한 결과 5일 새벽까지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때에 적병 수십 명을 사살하고, 무기 및 군량을 다수 노획하였다. 곧 이천의 본진으로 환군하여 군인들을 위무하고, 이어 군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이현·남천(南川)·원적산(元寂山)·양지·한강 등의 요긴한 곳을 순찰·감독시켰다. 그리고 이어 각도·각군에 격문을 발송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을 호소하였다. 마침 이 때 왕의 애통조(哀痛詔)가 전달되었다. "왜적이 대궐을 침범하여 국가의 안위가 조석에 박두했으니, 모쪼록 힘을 다해 토벌하라. 경들의 자손에게 의당 후한 녹을 내릴 것이다. 김병시로 삼남창의도지휘사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으로 목인관(木印官)을 삼아 장차 목인을 선포키로 한다. 경기도는 순의군(殉義軍)이라 하고, 충청도는 충의군(忠義軍)이라 하고, 영남은 장의군(仗義軍)이라 하여 8도에 반포하노니, 8도 각 고을은 모두 호응하여 창의하기 바란다." 이와 같은 왕의 애조에 대하여 김하락이 눈물을 흘리며, "국가가 달걀 포개 놓은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임금이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상황을 빚어낸 것은 모두 신민된 자의 허물이다. 아! 우리 제군은 동심동력하여 국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도록 하자." 하고 호소하니, 여러 장졸들이 눈물을 흘리며 몸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하였다. 12월 29일 적병 2백여 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였는데, 다음 날 큰 눈이 내리고 설상가상으로 풍설을 맞받으며 싸우게 되어 눈조차 뜰 수 없는 상황 중에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장령과 군졸 태반이 흩어져 도주해 버리니 대장은 친위병을 거느리고 죽산쪽으로, 구연영은 원주쪽으로 떠나가고, 나머지 장졸도 사방으로 흩어져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김하락도 섣달 그믐날 밤을 민가에 기숙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 병신년 1월 1일 적병이 사방을 수색해 들어오므로 여주 진소로 쫓겨가니, 대장 심상희(沈相禧)가 환대하였다. 수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그 진용을 살펴보니, 군대가 훈련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효가 5백 명도 되지 못하였다. 김하락은 심대장에게 이천으로 옮겨갈 것을 건의하였다. 1월 18일 합진(合陣)하여 이현으로 돌아와 보니 의지할 곳조차 없이 불타 버렸다. 다시 장졸을 모으고, 안성으로 격문을 보내니 민승천이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군사 수효를 점고하니 포군이 1천 8백 명이고, 장수·종사관을 합하면 2천여 명이었다. 모두 말하기를 패전한 장수를 다시 등용할 수 없다고 해서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삼고, 심상희로 여주대장을 삼고, 김하락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그리고 수일 동안 합진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드디어 1월 30일 광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는데,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라도 열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소금이 수백 석에 달하고, 무기와 탄약이 산더미 같았다.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 한데다가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한편 왜적은 광주산성이 의병의 손에 넘어갔음을 알고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우리나라 병사 5백 명을 징발하여 산성으로 몰려와 사면을 포위하였다. 김하락은 이 때의 관군들에 대하여,

"이자들은 비록 우리나라 민족이나 결국 왜적에게 넘어간 군사들이라, 부득이 적병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포군 36명을 내어 36개소의 소나무 숲 사이에 매복시켰다가 적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포를 차례로 터뜨리니 적은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고 후퇴하여 내려갔다. 그러나 적에게 이토록 자기 위치를 노출시킨 일이 얼마나 불리한가는 곧 판명되고 말았다. 즉 물러난 적당들은 의병장과 암통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고서, 박준영에게는 귀의한다면 광주유수를,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를 주겠다고 언질을 주어 배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군졸들을 대취하게 만들고 성문을 모두 열어 주어 2월 21일 새벽, 산성은 함락되고야 말았다. 그 때 김하락은 갑작스런 병으로 산을 내려가 조리하고 있었다. 다시 여러 장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25일에 신용희·김태원·구연영이 흩어진 군사 6개 연대를 모집 수습하고 와서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목인을 바쳤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제공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의당 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이나, 대장의 소임은 감당하지 못하겠다."하며, 누차 사양하였으나 결국 추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천 지방의 인심이 흩어졌으므로 영남 지방으로 옮겨갈 것을 합의하고 군사 9개 연대를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여주·흥원·백운산을 거쳐 제천 의병 진영으로 들어가니 대장 유인석 등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2월 30일). 3월 1일 다시 길을 떠나 단양·풍기·영천을 거쳐 안동에 이르렀다. 3월 8일 안동 유동역에서 유숙하고, 그곳 민가에서 곡식 30석을 빌어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백성 30여 호를 뽑아 구호미를 주었다. 그는 이처럼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노력하는 의병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었다. 이 때에 호서의진(湖西義陣)의 소토장(召討將) 서상열이 합세하기를 청해 왔다. 조성학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서로 의견이 엇갈려 오래지않아 갈라서게 되었다. 다시 행군하여 의성 금성산 수정사를 거쳐 청로점(靑路店)에 이르렀을 때, 경병(京兵) 300명이 군위(軍威)에 진을 치고 있다 하므로 덮치고자 하였지만, 조성학이 의흥(義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여 의흥으로 향하니, 군수가 도망해 달아났다. 무기와 화약 대여섯 짐 가량을 가지고 인리청(人吏廳)으로 진을 돌리는데, 배후에서 갑자기 포소리가 나므로 군중으로 하여금 호응케 하였으나, 조금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본읍 이속들이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엄습해 오려 하다가 중지하고 모두 흩어졌던 것이다. 다시 행군하여 고리곡(古里谷) 용애(龍崖)를 거쳐 압곡사(鴨谷寺)에 진지를 마련하였는데, 의성(義城) 의병이 적에게 대패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진을 동북으로 옮겨 사품(沙品)을 거쳐 대곡(大谷)에 이르러 그 대장의 거처를 물으니 청송(靑松)으로 옮겼다고 했다. 곧이어 의성 정현(鼎峴)의 의병이 습격을 받고 있다 하여 의성대장 김상종(金象鍾)을 찾아 합세하여 토벌하고자 하였다. 4월 2일 화현(火峴)에 잠복해 있다가 수십 명의 적을 사살시켰다. 이때의 싸움에서 청송진과 의성진은 모두 패주하였는데, 그의 군대만은 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해 간 적의 패잔병들이 동리사람들에게, "이천 의병은 참으로 강맹하니 절대로 우리들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4월 8일부터 13일까지 비봉산(飛鳳山)과 수정사 일대, 그리고 청로역(淸路驛) 안산과 순호(蓴湖) 등지에서 약간의 접전 끝에 적병을 몇 차례 물리칠 수 있었으나 운수가 불길하여 14일 이후 회오리바람이 몹시 불어서 이들의 주무기인 화승총에 불을 당길 수 없어 의병들이 우왕좌왕하였다. 이렇듯 접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구연영이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로 향해 떠나갔다. 남은 군사들을 점고해보니 4개 부대에 불과했다. 이때 적병 오십여 명이 습격하여 겨우 퇴각시켰다. 다시 행군하여 보름 동안 황산동(黃山洞)·황학산(黃鶴山)·금학산(金鶴山)·황산(黃山)을 거쳐서 청송(靑松)에 이르렀다. 이즈음 남은 군사는 30여 명에 불과했다. 5월 1일 덕현(德峴)에 당도하여 흩어졌던 군사들이 다시 모여서 9개 부대를 만들었다. 다시 행군하여 안덕점·유천점·영천 입암(立岩)을 거쳐 5일 경주 인비점(仁庇店)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경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계속 공격하여 오는 적과 접전 끝에 탄환 5발을 맞았으나 다행히 몸은 상하지 않았다. 이 전투로 마필과 군사물자를 적에게 모두 빼앗기고 군사들은 다시 흩어졌다. 의성의 대장 오혁주(吳赫周)가 합진하기를 청하여 함께 행군하여 청하(淸河)에 진지를 정하였다. 다시 그곳의 의병 및 청송진과 함께 영덕(盈德)으로 가서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申乭石)과 합세하였다. 그들 부대를 정리하여 청하·흥해·영해 등지로 분산시키고 그는 축산(丑山)으로 진을 옮겼다. 이렇게 의병부대들이 이합집산하는 일주일 내내 비가 심하게 내려 전투를 할 수 없었다. 5월 29일 안동의 유시연(柳時淵)이 6개 부대를 이끌고 와서 합세하기를 청하므로 함께 안동 화촌(花村)으로 들어갔다. 이때 적병 삼백여 명이 흥해진(興海陣)을 깨뜨리고 영덕으로 쳐 올라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유시연에게 영덕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고 함께 안동부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당시 24세에 불과했던 유시연이 주저하므로 쫓아 보내고 조성학과 더불어 진격하기로 하였다. 진격하기로 한 전날 밤 대장기가 땅에 떨어지면 운이 다하는 날이라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드디어 6월 2일 행군하려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 대장기의 폭이 땅에 떨어졌다. 모든 군사들이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운명이 다한 것을 예측한 그는 웃으면서 그대로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그날 전투에서는 무수한 적을 무찔렀으나 운명의 6월 4일 폭우가 퍼부었고 적병 수백 명이 수륙으로 밀려온다는 말을 듣자 의병진은 그대로 흩어졌다. 그를 따르는 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포탄을 무릅쓰고 좌충우돌하다가 탄환 2발이 연달아 좌우 갈빗대에 명중하였다. 명이 경각에 이른 것을 알고 그는 시신을 적에게 보일 수 없다 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따라서 군졸들도 한 때에 같이 물에 빠져 죽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연구(박성수) 9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3·581~6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28·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59~162·217~224·284~285·7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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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하락 자 : 계삼(季三), 호 : 해운당(海雲堂), 초명 : 길주(吉周), 이명 : 일길(日吉), 길굴(吉窟) 경북 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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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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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소 이천수창의소 의병전투지(노루목 장터) 경기도 광주시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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