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907년 8월 군대해산령이 내려지자 8월 1일부터 원주 진위대의 반대 의거가 있었고, 이어 8월 9일에는 진위 제1대대(본부는 수원) 강화 분견소 병사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강화는 일찍이 서세동점의 격변기에 얽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고장으로서 이곳 군인들과 주민들은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진위대 하사를 역임한 바 있는 유명규는 강화 진위 분견대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주민 약 5백 명의 호응을 얻어 사졸 50명과 함께 소대장 부위 민완식(閔完植)과 참위 민영락(閔泳洛)에게로 달려가 무기를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이 거절하자 사졸들과 주민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돌로 무기고를 파괴한 후 무기를 탈취하였다.민완식이 그들을 만류하자, "소대장을 죽여라"하고 외치면서 달려들어 해치려 하는 바람에 민완식과 민영락은 도주해 버렸다.이리하여 강화 진위 분견대 병사들은 위관급을 완전 축출하고, 이날 오후 6시 사병 50명이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봉기하였다.진위대 사졸들과 군중들은 먼저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를 쓰러뜨린 후 이어서 군아(軍衙)로 달려가 친일 군수이며 일진회의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고 강화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급보에 접한 일군 사령관은 진위 제1대대의 해산 임무를 띤 진위대 일인 교관 소창(小倉) 대위에게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어 이를 진압케 하였다. 10일 오후 4시 이들 일군이 갑곶동(甲串洞)으로 상륙하려 할 때 봉기한 진위병 사졸 50명은 갑곶동 동쪽 주벽(周壁)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강화부 동문쪽으로 후퇴하였다.이때 봉기한 병사들에게 많은 군중들이 호응, 합세하여 그 수가 1백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이들은 성벽에 의지하여 굳게 성을 방위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일군은 전사 6명 부상자 5명의 손해를 입었다.일군 사령관은 10일에 다시 2개 중대에 기관총 2문, 공병 1소대의 증원군을 파견하였으나, 11일 진위 봉기군은 이미 이 곳을 철수한 후 해주(海州)·통진(通津) 등 해서(海西)로 이동하여 지방 의병 부대와 합류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의 강화 봉기 진위병들은 전라북도 오천군(鰲川郡) 녹도(鹿島)로 들어가 일군 3명, 순사 1명, 일인 2명을 총살하여 그 곳을 점령할 수 있었다.강화 진위 분견대 봉기에 있어서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유명규는 그 후 9월 6일 통진에서 일군에게 체포되었는데 계속 항거하다가 총살 순국하였다. 그와 함께 봉기한 지윤성은 그후 재거를 꾀하다가 역시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75∼47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