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어릴 때의 이름은 상호(商鎬)로서, 1894년 9월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스스로 국어 국문의 과학적 연구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자, 총무 겸 교보원으로 그 창간에 참여하고 국문판 조필(助筆)이 되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우리나라 처음으로, ①국문전용 ②국문 띄어쓰기 ③쉬운 국어쓰기의 방법으로 발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의 창간과 함께 독립신문사 내에 국어국문 연구단체인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국문연구를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국문 연구단체이다. 국문동식회는 그후 국문연구회를 거쳐 일제하에서 조선어연구회로 발전했다가 조선어학회로 개칭되기에 이르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協成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협성회회보』편집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897년 12월 5일에는 22세의 청년의 나이로 일약 독립협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898년 11월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체포된 뒤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전개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지도자로 참가하여 격렬한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서울에서 상동(尙洞)의 사립학숙(私立學塾)에 국어문법과(國語文法科)를 신설하고 청년학생들에게 국어문법을 교육하는 한편, 국어국문 연구에 온 정력을 집중하였다.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국민들은 분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주시경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어문법을 확립하여 보급해야 함을 절감하고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였다.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에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할 때 이 준(李儁)의 추천으로 그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또한 주시경이 정부에 제출한 상소가 채택되어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에는 전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국문초학』을 간행하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國語文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해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를 간행하고, 이와 함께 『국어사전(國語辭典:말모이)』의 편찬작업에 최초로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각적 국어국문 연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와 한글이 재발견되어 애국계몽운동기에 과학적 국어문법이 처음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나라를 잃고 일제하에서 민족어와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모두 주시경의 국어 국문 연구작업의 토대 위에서 진전된 것을 고려하면 그가 한국민족에 바친 공헌은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그는 국어국문 연구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서우학회(西友學會)의 협찬원으로서, 그리고 대한협회(大韓協會)의 교육위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서우(西友)』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잡지에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는 애국논설들을 발표하여 국민을 계몽하였다. 그는 여성계몽을 위하여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가뎡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또한 1907년에는 양계초(梁啓超)의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월남망국사』를 간행해서 프랑스의 식민지통치에서 압박 받는 월남의 실태를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국민의 민족적 자각과 애국적 분발을 불러 일으켜 국권회복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 시기에 특히 한문을 모르는 일반민중과 부녀층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국문(한글)」을 전용하면서, 국민들에게 나라사랑과 함께 국어와 한글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각성과 분발을 계몽하였다.
주시경의 애국계몽운동 중에서 가장 열정을 많이 쏟은 부분이 국어교육이었다. 그는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민들에게 「국어」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국어」를 갈고 닦고 지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놓지 않으면 일제에 의하여 국어와 국문이 말살될 위험에 놓이게 되며, 국어와 국문을 잃으면 국권을 회복할 수 없고 반면에 국어와 국문을 굳게 지키고 발전시키는 투쟁을 전개하면 독립의 열쇠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여서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국어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시내의 18개 중학교에서 주 평균 40여 시간씩 국어강의를 실시하였다. 이것이 한 학교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는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한 강의였기 때문에 점심식사시간을 내지 못하여 굶으면서 이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하기방학에는 상동의 청년학원(靑年學院)에 「하기국어강습소(夏期國語講習所)」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을 모아서 무료로 국어국문을 교육하였다. 이 하기국어강습소의 강의는 전문적인 것이어서 국어국문의 과목을 ①음학(音學) ②자분학(字分學) ③격분학(格分學) ④도해학(圖解學) ⑤(變體學) ⑥실용연습의 6과로 나눈 본격적 강의였다. 이것이 얼마나 전문적 강의였는가는 제1분과의 강의안이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이라는 저서로 간행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일요일에는 보성학교안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을 설립하여 매 일요일마다 서울 시내의 청년학생들을 모아서 국어국문의 무료강의를 실시하였다. 조선어강습원의 수강생은 자발적으로 모인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그 효과가 매우 컸다. 1908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국어연구회(國語硏究會)를 조직해서 국어연구를 통한 국권회복을 다짐했는데, 이것이 일제치하에서 조선어연구회로 발전했다가 조선어학회로 개칭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29·469·548·992·10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