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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4677
성명
한자 權有東
이명 權泰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2 훈격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18일 경북(慶北)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성내(城內)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뒤이어 벌어진 병곡면(柄谷面) 병곡동(柄谷洞) 시위에 참여하여 병곡경찰관주재소(柄谷警察官駐在所), 면사무소(面事務所) 등을 파괴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기까지 3월 20여일(余日)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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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병곡면(柄谷面) 병곡동(柄谷洞)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병곡의 만세운동은 3월 18일 영해시위에 참가했던 시위군중이 병곡으로 시위 장소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권유동과 남조홍(南朝洪)은 영해시위에 참여했던 2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오후 2시경 영해 장터를 출발하여 병곡주재소로 향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해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그 수가 4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드디어 시위군중이 병곡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운동을 벌이자,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러자 권유동을 비롯한 시위군중들은 돌ㆍ곤봉ㆍ낫 등을 들고 주재소로 밀고 들어가 기물과 서류 등을 파기하고 벽까지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3명은 총을 들고 백석동(白石洞)으로 달아났고, 시위대들은 병곡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한편 달아났던 일본 경찰은 평해 헌병분견소로부터 지원 받은 3명의 헌병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때 시위군중을 지휘하던 정규하는 일본 경찰을 향해 "조선인 순사를 전부 데리고 오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도리어 총을 겨누어 발사하려 하였다. 그래서 정규하는 시위군중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산을 종용했고, 시위군중들은 오후 7시 반 무렵에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고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三ㆍ一義擧塔竣工式(1983) 10面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19. 7. 11)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40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32ㆍ433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유동 태동(泰東) 경북 영덕(盈德) 영해면 3.1운동
본문
1890년 1월 2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태동(泰東)이라고도 하였다. 영덕 지역 만세 시위는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장날 성내(城內)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3월 17일 친척 권태원(權泰源)이 집으로 찾아와 18일 오후 1시 성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설명하자 이에 찬동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주재소 앞에서 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세혁(南世赫)·박의락(朴義洛) 등이 시장에 나온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영해공립보통학교와 소학교로 옮겨가 교사와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경찰들에게도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약 3,000명으로 늘어난 군중과 함께 시장을 누비며 만세 시위를 펼쳤다. 시위대는 다시 주재소로 진입하여 주재소 안의 기물과 서류들을 파기하고 경찰들을 구타한 뒤 순사부장 사택에도 들어가 가구와 의류 등을 밖으로 꺼내어 부수었다. 이어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로 옮겨가 유리창과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주재소로 옮겨가서 건물과 순사부장 사택을 파괴하였다. 그 뒤 점심 식사를 하고 얼마간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 무렵 정규하(丁奎河)의 주도 아래 시위대 약 200명과 함께 오후 2시경 병곡면주재소를 향해 이동하였다. 도중에 주민들이 합세해 시위 군중은 약 400명으로 늘어났다. 병곡주재소는 이미 영해주재소의 연락을 받고 강원도 평해(平海) 헌병분견소의 지원을 요청한 상태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가 주재소로 몰려가자 경찰들은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으나 돌과 막대기 등으로 격렬하게 공격하자 일본인 및 한국인 경찰 3명은 달아났다. 군중과 함께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가 파괴하였다. 달아났던 주재소 경찰이 평해 헌병분견소에서 출동한 헌병 및 병사 6명과 합세하여 돌아왔다. 이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려 하자,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군중과 함께 해산하였다. 이때가 오후 7시경이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겪은 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 대구지방법원 1919-07-1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북도 영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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