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안북도 정주(定州) 사람이다.
기독교와 서구문명세력이 일찍부터 유입되는 평안도 지방에서 출생한 그는 독립사상과 자유민권사상에 어려서부터 고취되어 있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세력이 강하게 뿌리를 박고 있는 정주지방에서의 항일운동은 다른 지방의 그것에 비해 훨씬 강하였다. 1910년 주권을 완전히 상실 당하자 곳곳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인 특성이 있는 곳에서 청년시절을 보냈으므로 유달리 독립의식이 강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자 3월 5일에는 정주 읍내에서 예수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태극기를 선두로 읍내를 순회하며 만세를 부른 것을 비롯하여 3월 31일 정주장날에 전 군민이 참가한 가운데 3 1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그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나 일본 경찰, 헌병들의 무력적인 행위로 92명이 현장에서 희생되었고 검거된 사람만도 70여 명에 이르렀다. 수배 중에 있던 그는 이때 일본군의 눈을 피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상해에서의 그는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는 한편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기자가 되었다. 이 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일 상해의 프랑스조계(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석황(金錫璜) 이유필(李裕弼) 등의 노력으로 임시정부 기관지로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는 상해와 인접 지역에서 기사를 송고(送稿)하는 등 예리한 필봉(筆鋒)으로서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1921년에는 박은식(朴殷植) 박시창(朴始昌) 박경산(朴景山) 황 훈(黃勳) 등과 함께 중국인 임택풍(林澤豊)의 지원으로 사민보(四民報)를 발행하여 한중(韓中) 양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9월에는 한중 양국민의 공동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가 창설되자 그 문서과(文書科) 간사에 임명되어 독립신문 보급,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항주(杭州)의 중국도서관에 파견 근무하게 된 뒤부터 한국역사자료수집(歷史資料蒐集)에 3년 동안이나 힘을 바쳐서 마침내 「고려사가(高麗詞歌)」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상해의 불란서조계에서 병으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9 42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7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1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1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