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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335
성명
한자 方定煥
이명 小波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관련정보


2017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7년 비밀 결사(秘密結社)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고 천도교(天道敎)청년회원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지하제작배포활동하였으며 1921년 필화 사건(筆禍事件)으로 왜경에 피검되는 등 전국청소년 및 어린이회장으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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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1913년 선린(善隣)상업학교에 들어가 2년 중퇴한 뒤, 1917년에 비밀결사로서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손병희(孫秉熙)선생의 3녀 용화(溶嬅) 여사와 결혼, 1918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신청년(新靑年)」, 「신여자(新女子)」, 「녹성(綠星)」등의 잡지 편집을 맡아보았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손병희(孫秉熙)의 사위로서 그의 영도 하에 천도교청년회(天道敎靑年會)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협력하고, 또한 오일철(吳一澈)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

이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 문학과에 입학해서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1921년 여름방학으로 일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天道敎少年會)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댓말 쓰기 운동을 벌였으며 1922년에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 민족재기(民族再起) 운동으로서의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이어서 고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 선포했다.

1924년에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全國少年指導者大會)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乾坤)」과 「신여성(新女性)」을 발간하고, 동화대회(童話大會)를 개최하였다.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자 일선에서 은퇴하고, 강연회·동화대회·라디오 방송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世界兒童美術展覽會)를 개최하였다. 1931년 새로운 월간잡지 「혜성(彗星)」을 발간하는 등 활동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하고 친구들에게 유언한 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81·482·1019·1032·1042·1044·1045·1049·1062·1066·1067·1070·1071·1072·1077·1078·1079·1080·1088·1091·1100·1101·11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4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87·403·432·460·461·6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33·602·604·606·61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16면
  • 동아일보(1923. 4. 30)
  • 기려수필 31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54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11·57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방정환 호 : 소파(小波), 도호 : 전암(筌菴), 필명 : 잔물, 목성(牧星), 몽견초(夢見草), 몽중인(夢中人), 북극성(北極星) 서울 -
본문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현(夜珠峴, 현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고개)에서 아버지 방경수(方慶洙)와 어머니 손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호는 소파(小波)이다. 잔물·목성(牧星)·몽견초(夢見草)·몽중인(夢中人)·북극성(北極星)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1905년 4월 서대문 근처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1907년 집안의 사업 실패로 사직동(社稷洞)으로 이사하고, 부친은 인쇄소에서 일하였다.1908년에는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 총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소년입지회는 처음에 8~9명의 소년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이 16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소풍·밤 줍기 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소년입지회는 1908년 권병덕(權秉悳)이 시천교(侍天敎) 내에 조직한 소년입지회와 동일 단체로 보인다. 권병덕은 총재로서 13세 이하의 어린이를 회원으로 1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개최하여 아동의 지식을 교환하도록 하는 등 소년입지회의 제반 활동을 주관하였다. 이 때 시천교 소년입지회의 총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를 따라 동학(東學)의 분파였던 시천교를 믿다가 강제병합 이후 천도교(天道敎)로 개종하였다.1909년 사직동 매동보통학교(梅洞普通學校) 입학하였으나, 1910년 집이 사직동에서 근동(芹洞, 현 서대문구 미근동)으로 이사하여 그해 10월에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 2학년으로 전학하였다. 1913년 3월 미동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11월 용산면(龍山面, 현 용산구) 청파동(靑坡洞)에 위치한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 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년』, 『붉은 저고리』, 『새별』 등의 잡지를 탐독했다고 한다.1914년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사자생(寫字生)으로 취직하였다. 측량사들이 측량 작업을 하면서 적어 놓은 기록과 지적도에 필요한 토지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토지조사부에 정확히 정자로 옮겨 적는 일을 하였다. 이 때 평생의 친구가 된 유광렬(柳光烈)을 사귀었고 함께 기거하였다.1917년 4월 8일 아버지 방경수의 의형제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孫秉熙)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였다. 1918년 5월 장남 방운용(方云容)이 태어났고, 그 해 7월에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7월 7일 이중각(李重珏)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京城靑年俱樂部)를 발기하였다. 회장은 이복원(李馥遠·李復遠) 부회장은 이중각이 맡았고, 유광렬과 함께 청년구락부의 실질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봉래동(蓬萊洞) 소의소학교에서 경성청년구락부의 송년회를 개최하고, 소인극(素人劇) ‘◯◯령’을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1919년 1월 20일 유광렬·이중각·이복원 등과 경성청년구락부의 기관지 성격을 지닌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창간하였다. 『신청년』은 제6호(1921. 7)까지 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광렬의 회고에 따르면, 만세운동 때 「조선독립신문」을 오일철(吳一澈)과 함께 인쇄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제 경찰에 잡혀 구금되었다가 1주일 만에 풀려났다고 전한다. 같은 해 9월 2일 창립된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의 간의원(幹議員)으로 선출되었다. 교리강연부는 만세운동으로 천도교의 핵심 지도자들과 많은 교인들이 투옥되면서 위기 상황을 맞게 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교리강연부는 천도교의 지방조직을 활용하여 전국 각지에 지부 설립하였으며, 중앙에 편술부·음악부·체육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편술부에서는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예술 잡지 『녹성(綠星)』의 간행에 참여하였다.1920년 3월에는 김원주(金源珠, 김일엽)·신준려(申俊勵)·박인덕(朴仁德) 등이 창간한 『신여자(新女子)』의 편집고문이 되었다. 『신여자』는 최초로 여성들이 만든 여성잡지였다. 1920년 4월 25일 교리강연부의 명칭을 천도교청년회(天道敎靑年會)로 개정하고, 6월부터 잡지 『개벽』을 발행하였다. 이때부터 개벽사에서 일하며 1931년 사망할 때까지 『어린이』, 『별건곤』, 『학생』, 『혜성』 등 개벽사 잡지 발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1920년 9월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1921년 1월 김상근(金相根)·박달성(朴達成) 등과 함께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양근환(梁槿煥)의 ‘민원식(閔元植)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10여 일간 수감되었다. 4월 5일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발회식을 거행하고, 지회장을 맡았다. 4월 9일 도요대학(東洋大學) 전문학부 문화학과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새로운 사상과 학문의 수용은 물론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1921년 4월에는 김기전(金起田) 등과 함께 천도교청년회 산하에 소년부를 두고, ‘어린이운동’을 시작하였고, 5월 1일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天道敎少年會)로 개편하였다. 6월에는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에서 ‘현대문화 사상의 고취와 천도교의 진리를 선전’할 목적으로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였다. 순회강연단 제1대는 박달성·정일섭(鄭日燮), 제2대는 정중섭(鄭重燮)·전민철(全敏轍)이 맡았고, 제3대를 민병옥(閔丙玉)과 함께 맡아 전국 각지에서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1922년 3월 도요대학을 자퇴하였다. 천도교소년회에서는 같은 해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정하고, 그 취지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로 선전하였다. 이것이 현재 5월 5일 어린이날의 시작이었다. 그 해 6월에는 개벽사에서 세계의 명작동화 10편을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1923년 3월 20일 편집 책임을 맡은 잡지 『어린이』 창간호가 개벽사에서 발행되었다. 같은 해 4월 17일 천도교소년회·불교소년회·조선소년군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이 단체는 상설기관이 아니라 1922년 천도교소년회가 처음 시작한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전국 규모의 행사로 확대하기 위하여 조직된 비상설기관이었다.1922년 5월 1일에는 도쿄에서 색동회 발회식이 거행되었다. 1923년 3월 16일 도쿄 센다가야온덴(千駄谷穩田) 101번지 하숙집에서 강영호(姜永鎬)·손진태(孫晋泰)·고한승(高漢承)·정순철(鄭順哲)·조준기(曹俊基)·진장섭(秦長燮)·정병기(丁炳基) 등과 함께 색동회 창립을 준비하였다. 모임의 명칭을 색동저고리의 순수 우리말 색동에서 따와 ‘색동회’로 하기로 합의하였고, 아동동화·동요를 중심으로 일반 아동문제까지 다루는 소년운동단체로 출범시켰다. 그해 7월 23일 색동회와 어린이사 공동주최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를 6일간 개최하고, 김기전 등과 강연하였다.1923년 9월 2일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으로 재편하였다. 1931년까지 청년당의 중앙집행위원 등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다. 청년당에서 전개한 7대 부문 즉 농민·노동·상민·청년·학생·여성·소년운동 중 소년운동 부문의 책임자였다. 같은 해 9월 도쿄에서 서울로 완전히 귀국하였다.1924년 2월에 발행된 『신여성』 제3호부터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25년 8월 발행된 『어린이』 제31호부터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아 이전부터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어린이』의 명실상부한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개벽』의 발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위기 상황에 빠진 개벽사의 주무로 활동하며,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반 ‘잡지왕국 개벽의 총리’로 불릴 정도로 개벽사 잡지 발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1927년 7월 30일 개최된 조선소년연합회 발기대회에서 창립 준비위원을 맡았다. 10월 16일 조선소년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조선소년연합회 임시대회에서 어린이날을 메이데이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5월 첫 일요일로 결정하였다. 1928년 3월 25일 조선소년연합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명칭을 조선소년총동맹으로 변경하려고 했으나 일제 경찰의 반대로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으로 결정하였다. 10월 2일 색동회와 어린이사 공동주최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1929년 천도교소년회연합회 대표를 맡았고, 전암(筌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같은 해 2월부터 개벽사에서 발행된 『학생』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31년 1월 『학생』을 정간하고 대신에 1926년 11월부터 휴간 상태에 있던 『신여성』을 속간하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1931년 3월 18일 서울지역 소년단체 대표자들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전선(全鮮)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를 결성할 때 총무부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9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가 7월 23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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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역 망우역사문화공원(애국선열묘역) 서울특별시 중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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