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현북면은 4월 7일과 9일에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7일은 현북면 원일전리(元日田里)·장리(獐里)·도리(陶里)의 주민과 그곳 서당 생도 등 300여 명이 서면 용천리를 거쳐 양양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때 군중을 모으고 시위를 계획했던 사람은 원일전리의 박규병(朴奎秉)과 박용규(朴容圭) 그리고 장리에서 교사로 있던 이성윤(李聖允)이었다. 원래 4월 9일 양양읍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원일전리 박원병(朴元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어 양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부득이 4월 6일 원일전리 가마솥 제조장에서 40명의 군중에게 만세시위계획을 알리고 다음날 7일 아침 장동리현(獐洞里峴)에 집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양읍내로 행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 밤 자택에서 박용규 등이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다음날 7일 아침 장동리현으로 가서 그 곳에 운집한 300여 명이 양양읍내로 행진하던 중 임천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용천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경찰을 향해서는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희택은 1919년 4월 9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사무소 앞에서 김재한(金在漢)·김종대(金鍾大) 등과 함께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34개, 종이로 만든 대형 태극기 1개, 천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 1개를 휴대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소요’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20년 3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소요의 공소사실은 무죄를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12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20. 3. 8)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9권 137~14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