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그는 유림 출신으로 조선조 말인 1895년에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동년 12월에 영양(英陽) 의병장 김도현(金道鉉)과 함께 권세연(權世淵) 의진(義陣)에 참가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망국(亡國)의 통한을 새기며 민족의식을 다져가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儒林團) 대표로 파리장성(巴里長書)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전유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유연박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35면
- 벽옹김창숙일대기(심산사업회) 95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