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 11. 23 경남 (慶南) 동래중학교 (東萊中學校) 5학년 (學年) 재학시 일인 (日人) 들의 소위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 (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 에 참가하여 동대회 (同大會) 에서 일인 심판진 (日人審判陣) 의 부당한 처사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 항의하고 부산 (釜山) 제2상업학교 (商業學校) 학생 등 한국인 학생 1,000여명과 함께 시가행진하며 「무엇이 ‘내선일체’ (內鮮一體) 냐」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고, 대회 심판장 (大會審判長) 인 내태겸치 (乃台兼治) 일 육군 대좌 (日陸軍大佐) 의 관사 (官舍) 를 파괴, 심판장을 구타하다 피체 (被逮) 되어 징역 8월을 받고 1년여간 옥고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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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釜山) 공설운동장에서는 이른바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가했던 부산 제2상업학교 및 동래(東萊)중학교의 한국인 학생 1천여 명은 일인 심판진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일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한 것에 분노하여 당시 금지곡이던 「아리랑」, 「도라지」 등의 노래를 고창하고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벌이는 한편, 경남지구 위수사령관(衛戍司令官)으로서 대회 심판장을 맡았던 일본군 대좌(大佐) 노다이(乃台兼治)의 관사(官舍)를 습격 파괴하고 그를 구타하였다.
이에 일경과 헌병이 출동하여 200여 명의 학생이 붙잡히고 주동자로 지목된 11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이 항일시위는 일제의 군국파시즘적 탄압에 짓눌려 있던 민족혼을 충격적으로 일깨웠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었다.
이때 동래중학교 5학년생이던 그도 붙잡혔으며, 1941년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556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63면
-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정세현, 1975. 9. 20) 488∼492면
- 학적부(부산공립고등보통학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720∼727면
- 매일신보(1940. 11. 24, 11. 25)
- 동아일보(1940. 12. 28)
- 부산시사(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74. 2. 27) 1099∼1105면
-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9. 10) 84∼89·169∼17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