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3월 2, 3일경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을 통하여 「독립선언서」가 부산·마산에 비밀리에 배부되기 시작하였다. 또 이때 서울로부터 학생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京城學生團)의 이름으로 부산상업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으로의 궐기를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일신여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에 연락이 되면서 모두 만세시위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3월 11일 새벽 일신여학교 기숙사 주변을 비롯한 각처에는 격문이 뿌려져 애국학생들의 마음을 더한층 설레게 하였다. 이날 아침 일찍이 고등과 4년생 김응수(金應守)는 이 격문을 주워서 기숙사 주경애(朱敬愛) 선생에게로 달려가 격문을 보였다. 교사 주경애는 “이 격문은 중앙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는 격문이니 비밀을 지키고 있어라”라고 귀띔을 해 주면서 “오늘 저녁 9시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앞서 주경애는 일신여학교의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개시되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고 종용하여 이들과 만세시위 할 것을 약속한 후 이 사실을 극비리에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3월 10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 고등과 학생 11명은 밤이 깊어가는 것을 기다려 벽장 속에 숨어서 밤새워 태극기 50개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고등과 학생 11명과 교사 주경애·박시연은 오후 9시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 문을 뛰쳐나와 좌천동(左川洞)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거리의 대중들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과 합류한 시위 군중 수백 명은 감격에 넘친 힘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군경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는 더 계속할 수 없었다. 출동한 군경은 여학생 전원과 여교사를 검거하여 부산진주재소(釜山鎭駐在所)에 격리 수용한 후 개별 문초를 하였다.
박시연은 3월 11일 일신여학교 제자들과 좌천동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4. 7)
- 신한민보(新韓民報)(1919. 9. 4)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180~181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20권 25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