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평양의 만세시위는 세 곳에서 시작되었다. 장대현 교회 앞마당인 숭덕학교 교정에서는 장로교인들이, 광성학교 근처 남산현 교회에서는 감리교인들이 설암리 천도교구에서는 천도교인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김태술은 3월 1일 광무황제의 봉도식이라는 명목 하에 숭덕학교 교정에 참석하였다. 장내는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로 꽉 찼다. 봉도식이 끝나자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이 이어졌고 애국가도 함께 불렀다. 경찰의 해산요구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이 행진을 시작하자 시위행렬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시위도중 천주교구당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군중과 합류하여 평양경찰서 앞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행렬과 합류하여 일본인 거리인 신시가지로 나아갔다. 오후 7시경에는 낮보다 배가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이 군중을 해산시키려 소방대원을 동원하여 물을 뿌리자 시위군중이 돌을 던져 경찰서 유리창을 깨뜨렸다. 이를 빌미로 경찰이 발포를 하면서 시위군중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수백 명이 검거되면서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또 김태술은 3월 15일경 독립운동을 홍보할 목적으로 2~3건의 경고문을 미국선교사 모리의 집에서 인쇄하였다.
김태술은 3월 1일 평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3월 15일경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경고문을 인쇄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19년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4. 12)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10. 4)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9권 219~22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