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월 1일 함남 원산(元山)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독교 신자인 김장석은 동년 2월 27일 곽명리(郭明里) 등 13인의 동지들과 함께 진성여학교(震星女學校)에 모여 서울의 만세시위에 호응하여 원산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8일 밤 동지 및 교인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각자 담당할 지역을 정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종이 울리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촌동(場村洞)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과 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으로 1920년 4월 18일 출소하였다.
출소 후 김장석은 원산청년회(元山靑年會) 서기로 활동하면서 항일의식을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의 독립열망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8월 20일경 동지 김상익(金相翊)·이용훤(李容暄) 등과 향후 계획을 협의하고 역할 분담을 하였다. 동월 21일 밤 김상익·이용훤은 김상익의 집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결사대 명의로 격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철시(撤市) 금지, 친일파 처단, 일본상품 매매금지, 관공서의 파괴 등이었다. 이 원고의 인쇄 및 교부를 담당한 김장석은 비밀리 함남 덕원군(德原郡) 현면(縣面) 두산리(斗山里)의 이봉설(李鳳雪)을 찾아가 동인에게 의뢰하여 진성여학교 교사실에서 180매를 인쇄하였다. 그날 밤 이것을 휴대하고 동아일보 원산지국에 가서 절반을 김상익에게 배부하고, 나머지는 이용훤의 집에서 그에게 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된 김장석은 1919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決定書(咸興地方法院 元山支廳, 1920. 12. 2)
- 東亞日報(1923. 9. 23)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新聞(1921. 1. 21)
- 朝鮮日報(1921. 2. 18)
- 元山騷擾事件 續報(1920. 11. 3)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981~98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권 1213~121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670~67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