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유림계에서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고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장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19년 경남 거창(居昌)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星州)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외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 뒤 그는 만주(滿洲)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만주·내몽고(內夢古)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대구(大邱)에 와서 김화식(金華植)과 송영호(宋永祜)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 200,000원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柳友瑾)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파리장서사건에 이어 이러한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47∼251ㆍ283∼287면
- 謙受齋遺稿(李泰植從姪 李弘基文集, 1972) 38면
- 면우집(아세아문화사, 1984) 6면
- 壽山先生挽祭錄(毛筆草本, 1952년 1월)
- 鐵城敬覽圖(1958년 3월) 9면
- 벽옹일대기(心山記念事業會, 1969) 98면
- 韓國儒林獨立運動 巴里長書略史(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 1973) 5면
- 重齋先生文集(金榥, 1998)附錄 13집 88ㆍ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