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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음)4월 5일 경상북도 대구부 본정 2정목(현재 중구 서문로 2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상화(想華)·무량(無量)·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14세까지 집안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에게 훈육을 받으며 한문을 수학하였다.1915년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에 입학하고 계동의 전진한(錢鎭漢) 집에 하숙하며 통학하였다. 1918년 3월 같은 학교 3년을 수료한 후 대구로 내려왔다. 이 무렵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白基萬)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고, 시작(詩作)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7월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3개월 만에 귀가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이었던 친구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계성학교와의 연합 시위를 위해 연락 책임을 맡았다. 이후 자신의 사랑방에서 백기만, 계성학교 학생 정원조(鄭元祚) 등과 모여 연합 시위를 합의하였다. 그런데 주요 인물이 일제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서울 박태원(朴泰元)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그럼에도 3월 8일 대구 서문 밖 장날 시위는 학생들의 주도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같은 해 10월 충남 공주 출신의 서순애(徐順愛)와 혼인하였다.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나도향(羅稻香)·홍사용(洪思容)·박종화(朴鍾和) 등과 교류하며, 『백조』 창간호(1922년 1월호)에 「말세(末世)의 희탄(欷歎)」 등 3편의 시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간다(神田) 소재 외국어 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즈(Athenae Francaise)에 입학해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같은 학교를 수료하였지만, 9월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프랑스 유학의 꿈을 접고 귀국하였다. 서울 가회동에 머물면서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백조』 3호(1923년 9월호)에 「나의 침실(寢室)로」를 발표하였다. 이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무산계급 문예운동 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에 참여하였다.1925년 2월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 강연회 및 시 낭독회’에 출연해 시 낭독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의 조직적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여 『개벽(開闢)』·『여명(黎明)』 등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번역물 등을 발표하였는데, 작품 경향이 점차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에서 사회 참여적인 경향파(傾向派) 계열로 변화하였다.1926년 5월 카프의 준기관지 『문예운동』 2호에 2편의 시와 1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일제강점기 한국에 대한 울분과 답답함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6월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대표적 민족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이후 『별건곤(別乾坤)』, 『조선문예(朝鮮文藝)』, 『신여성(新女性)』, 『문장(文章)』 등의 잡지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저항의식과 향토성을 띤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1928년 6월 신간회 대구지회 회원 장택원(張澤遠) 등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한 이른바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당시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간사를 맡고 있었다. 1933년 8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敎, 현 대륜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한국어, 영어, 작문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학교를 사임하고 『조선일보』 경북총국을 운영하였는데, 사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1937년(1936년 설도 있음)에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친형인 중국군 장군 이상정(李相定)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베이징(北京)·난징(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로 끌려가 20여 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근무하면서, 교가를 작사하고 권투부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1939년 교남학교 교가의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고, 원고 등을 압수당하였다.1948년 3월 16일 대구 달성공원에 해방 후 최초로 그의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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