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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2월 20일 서울 남부(南部) 죽동(竹洞)에서 아버지 한세진과 어머니 김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는 효창(曉蒼)이다. 1893년에서 1921년까지 한학과 국학을 배웠고, 15세에 사서삼경을 정통하였다. 아울러 우리 말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일보』 등에서 신문 편집기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7년 6월부터 계명구락부가 조선어사전 편집부를 설립하자, 사전 집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9년 철자법의 불통일과 경비 부족 등으로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이 중단되자,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부를 탈퇴하였다. 이후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하였다.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들어가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뒤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하였다. 조선어학회가 1934년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에서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어와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고,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이에 1934년 12월 2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표준어 사정 문제를 결의하고,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讀會)를 충남 온양(溫陽)에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사정위원은 회원 이외에 각 도별로 하되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기에 서울과 경기 위원이 총 위원의 반수가 되게 하였고, 그 외의 반수는 방언에 대한 참고를 위하여 각 도별로 위원수를 배정하였다. 이때 사정위원 40명 가운데 포함되었다.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는 1935년부터 열리기 시작하여 1936년에 끝을 맺었다. 1935년 1월 2일부터 5일간 온양온천에서 열린 제1독회에서 32인과 함께 출석하여 사정안을 토의하였다.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표준말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이고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이후 수정위원 16명을 선정하여 다시 수정하게 할 때, 수정위원 16인에 포함되었다. 그 뒤 조선어학회에서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의 거족적·민족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사정위원 30명을 늘렸다. 지역적 안배까지 고려하여 교육계·종교계·언론계 등 사회의 각계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총 70인이 선정되었다. 서울·경기 출신 35인과 각 도의 인구수 비례에 따른 지방출신 35인으로 안배할 때, 서울 출신에 배정되었다.
같은 해 8월 우이동(牛耳洞) 봉황각(鳳凰閣)에서 제2독회가 열리자, 30명의 위원과 함께 출석하여 토의한 수정안에 대해 재차 토의하였다. 그리고 다시 수정위원 25인을 선정하여 이를 수정하게 할 때, 다시 수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6년 7월 30일부터 3일간 조선어학회는 제3독회를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열었다. 이 독회에 32인의 위원과 함께 참석하여 수정위원이 제출한 토의안에 대해 토의하였다. 그리고 최종 수정위원 11명을 선정하여 사정안 전체에 대해 수정하게 함으로써 표준말의 사정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표준어사정안」을 발표하였다. 표준어 6,231개·약어 134개·비표준어 3,082개·한자어 100개로 사정 어휘총수는 9,547말에 달하였다. 이날 조선어학회에서는 239쪽에 달하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도 발간하였다. 이 책자는 철자사전(綴字辭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도록 편찬되었다.
한편 표준말 사정에 참여하면서도 몇 편의 글을 1932년부터 발행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에 기고하여 우리말 연구에 참여하였다. 1937년 9월 『한글』 48호에 「양문대신의 언문 시」라는 글을 통해 조선후기 대신이었던 이서구가 언문 시를 지어 교만한 어느 재상가의 아들을 혼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같은 호에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이름을 연구하여 「조선말 지명」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39년 4월에는 『한글』 66호에 「군수의 꿈」이라는 작품을 지어 백성의 재산을 토색질하던 악질 군수를 비판하였다. 이 작품의 전체 문장을 한글로만 썼고, 부득이 한자어에 한자를 쓸 경우 괄호 안에 한자를 넣었다.
또한『조선어대사전』의 편찬에도 헌신하였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극로는 민족어사전을 편찬하고자 민족주의자 신명균·이중화·이윤재와 협의하고, 최현배·장지영·정열모 등의 협력을 받아 1929년 10월 31일 경성부 수표동(水標洞)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사전 편찬의 전담집필에 이극로·이윤재·김선기·이용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2년간 사전편찬원들과 각종 어휘를 분담 수집하면서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문계통 어휘의 정리를 맡아 진행하였다. 특히 서울 출신이었으므로 서울말에 정통하여 사전 편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전편찬 작업은 1933년 6월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이에 생계 문제로 1933년에서 1935년까지 『조선중앙일보』에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다.
1936년 3월 20일 이극로의 노력으로 사전편찬 후원회가 조직되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추진해온 사전 편찬 업무를 인계받았다. 이에 1936년 4월 조선어학회에 다시 들어가 1942년 9월까지 조선어대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4월부터는 정인승·이윤재·이극로·이중화와 함께 사전 편찬 전임위원이 되었다. 특히 서울 구석구석의 유래, 의복, 음식, 길흉간의 민속, 주택, 사색(四色)에 따라 다른 풍습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와 관련된 어휘를 모두 정리하여 조선어대사전에 수록하였다. 또한 사전 원고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한데, 사전 원고지의 양이 이극로와 더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이었다. 당시 함께 사전편찬원으로 있었던 권승욱은 “언제나 쉴 새 없이 원고 쓰시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문세영이 단독으로 조선어사전을 만들 때, 사전 원고의 교정을 책임지고 마무리해 주었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윤재도 문세영 사전의 체계에서부터 교정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도해 주었다. 이런 두 사람의 도움으로 문세영은 1938년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1938)을 최초로 발간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대사전 편찬 시기, 동지들에게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조선말 큰 사전을 빨리 세상에 내놓아 우리말이 보존되어 우리 민족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을 포함하여 이극로 등 사전 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고로 드디어 『조선어대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대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1940년 3월 7일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000여 매를 완성하였다. 이 『조선어대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같은 해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조선어학회는 이우식의 재정 후원받아 1942년 봄부터 사전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어휘를 정리한 원고를 1942년 말까지 인쇄소로 넘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1942년 10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하였고, 사전 원고도 사전편찬원과 함께 함남 함흥(咸興)으로 이송되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언어독립투쟁임을 간파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6~7차례나 철저히 수색하였고, 급기야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하는 과정에서 조선어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10월 1일 붙잡혀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투옥 중 홍원경찰서에서 일제 형사로부터 물고문을 받고 날마다 구타를 당하였다. 하지만 일제 형사에게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항의하였다.
1943년 9월 13일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아내가 직접 함흥감옥에서 유해를 수습한 후, 경기도 과천(果川)에 안장하였다.
광복이후 조선어학회가 재건되어 일제시기 완간하지 못한 조선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원들은 사전의 이름을 우리말을 살려 『조선말큰사전』6권(1947∼1957)으로 바꾸어 출판하였다. 남긴 글로는 「양문대신의 언문 시」, 「조선말 지명」, 「군수의 꿈」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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