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856년 3월 6일 경상북도 금릉군(金陵郡) 구성면(龜城面) 국평리(金坪里, 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서 아버지 여석기(呂錫璣)와 어머니 일선 김씨(一善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무현(武見)이고, 호는 남은(南隱)이다. 백부 여석희(呂錫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세인 1861년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듬해 1862년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린 나이에 가사를 도맡게 되었다.1894년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해 양반 유생의 입장에서 “하늘도 반드시 싫어하여 스스로 토멸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성토하였다. 그렇지만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사실에 대해서는 외세 간섭이라며 탄식하였다.1896년 3월 10일 일어난 김산(金山)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찬획(贊劃)을 맡아 군사의 모집과 군비의 조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산 의병부대는 금릉(金陵)·지례(知禮)·개령(開寧) 등지의 유생들과 선산(善山)과 상주(尙州) 등지의 유생들이 참여하여 결성한 연합부대였다. 대장 이기찬(李起璨)을 비롯하여 중군 김기력(金基櫟), 찬획(贊劃) 조동석(趙東奭)·이용주(李龍周)·강일선(姜馹善)·허겸(許蒹)·이능규(李能圭)·이상설(李相卨), 군관 강무형(姜懋馨)·이기하(李起夏), 종사 이숭주(李崇周)·최동은(崔東殷), 참모 허위(許蔿)·여영소(呂永韶), 군량도감 조석영(曺奭永)·여승동(呂承東)·이현삼(李鉉參)·조남식(趙南軾), 장재관(掌財官) 배헌(裵憲)·강명숙(姜明叔)·박래환(朴來煥) 등으로 편성되었다.김산 의병부대 해산 후에는 1898년 상경하여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각처 유생들을 규합하여 오백의사론(五百義士論)을 비롯한 양병론(養兵論)을 발표하여 국난에 대처하기 위한 여론을 환기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이후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배일(排日)언론투쟁(言)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각 지역의 유생들을 비롯하여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관료들을 규합하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1904년부터 1906년까지 전개하였던 배일언론투쟁은 「논국시정정부서(論國是呈政府書)」(1904)와 「정정부서(呈政府書)」(1904. 7), 「여일본전권공사이등박문서(與日本全權公使伊藤博文書)」, 「기일본공사관서(寄日本公使館書)」, 「여주한일본육군사령관장곡천호도서(與駐韓日本陸軍司令官長谷川好道書)」, 「여일진회장윤시병(與一進會長尹始炳)」 등의 편지를 정부 인사들에게 송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서한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고발하고 항의·규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일언론투쟁에 참여한 유생들은 이건석(李建奭)·우용택(禹龍澤)·강원형(姜遠馨)·김진수(金進洙)·김호규(金濩圭)·이병구(李炳九) 등 당시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던 충의사의 회원들이었다.1905년 8월 24일 우용택·지우석(池禹錫) 등과 함께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 폭파를 시도했다가 일제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헌병대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중상을 입고, 7개월의 옥고를 겪은 뒤, 1906년 2월 풀려났다.1906년 6월 26일 서울 혜화동(惠化洞)에서 허위·이강년(李康年)·우용택·이병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결의를 하였다. 당시 노모(老母)가 있던 우용택과 신병을 앓고 있던 이병구를 제외하고, 허위·이강년 등과 함께 창의하기로 하였다. 허위는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이강년은 상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 그리고 자신은 김산(金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거쳐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합세하여 서울에서 모여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9월 18일 김산군의 병기창고(兵器倉庫)에 저장된 총포 80여 정을 인수하여 장정 180명을 무장시키고, 군비 200냥(兩)을 준비하였다. 9월 27일 새벽 행군사마(行軍司馬)에 이근하(李根夏), 후군참모(後軍參謀)에 조동림(趙東琳), 그리고 자신은 선봉을 맡아 발정하고자 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병과 과로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말아서 의병 활동은 중단하게 되었다.하지만 서울에서 전개한 국권회복의 일환인 계몽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06년 4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창립에 김산 출신의 여영조(呂永祚, 永韶)와 함께 고문(顧問)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2월에는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의 인사들이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설립하자 김산 출신의 박의현(朴宜鉉)·여영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교남교육회잡지(嶠南敎育會雜誌)』 창간호에 「축사(祝辭)」를 싣기도 했다.1907년 11월 여영조와 함께 향리인 기동(耆洞)에 사립 양성학교(養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학부에 설립 인가를 신청한 사립학교로 향내의 유지들과 군수 임승학(林承學)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였다. 교과목은 일어(日語)·산술(算術)·지지(地誌)·역사(歷史)·법률(法律)이었으며, 교사는 신학문을 공부한 인사를 채용하였다. 1913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유고로 『남은선생유집(南隱先生遺集)』 두 권을 남겼다. 이 문집에는 평소 우국의 심정과 애국계몽적 활동이 드러나는 시 100여 수와 서(書) 43편 등이 수록되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봉기에서부터 전기의병과 후기의병, 그리고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직접 기록한 일기류의 글 등이 선별적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한말부터 일제 초기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란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