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일제말기 연합군 포로의 감시요원으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朝鮮軍)에 한국인 포로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3천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징집되었다. 일제 경찰은 학력·직업·연령·가족사항 등을 조사하여 군속대상자에게 출두명령서를 전달하였고 순사부장의 강권에 의해 징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포로감시원 지원자는 극히 적었기 때문에 각도에 할당되어 실시되었으며, 각 부, 읍면장과 아울러 경찰서·주재소에서 응모를 강권하였다.
군속으로 징집된 민영학은 부산의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로 출발하였다. 민영학 등 한인 군속(軍屬) 1,400명은 1942년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민영학 등 한인들은 원래 2년 계약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1944년 6월 임기가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한편, 일제가 연합국에게 패하는 것을 본 자바섬에 있던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한인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李億觀)을 중심으로 중부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4년 12월 29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이 책임자가 되어 민영학·노병한(盧秉漢)·조규홍(曺奎洪)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중부 자바 암바라와지역에서 고려독립청년당 활동을 하던 민영학을 포함한 한인 6명이 1945년 1월 3일 말레이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 명령을 받게 되었다. 전속 명령을 받은 한인 군속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의 조직이 일본군에게 누설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이에 민영학은 손양섭·노병한과 밤을 새워가며 사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다른 방안이 없었다. 다음날인 1월 4일 일본군의 전속명령에 따라 민영학 등 전출자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민영학과 손양섭·노병학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로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천발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한 후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자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겨서 위생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在자바 高麗獨立靑年黨과 세 義士(安承甲, 1957년) 40~42, 49~56쪽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ⅳ(독립기념관, 2006) 동남아지역 155~156면
- 朝鮮日報(1947. 1. 14)
- 赤道下의 朝鮮人叛亂(內海愛子·村井吉敬 共著, 1980) 148~1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