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0년에
3. 1922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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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출옥(假出獄) : 가석방의 전 용어, 형기가 끝나지 않은 죄수를 일정한 조건하에 미리 풀어주는 것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경기도 경성(京城) 사람이다.
대한제국시대 육군 부위(副尉)를 역임하였으며, 1905년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군복을 벗어던지고, 1906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전덕기(全德基) 등 동지와 함께 구국운동을 하던 중 각 지방 의병 운동의 연락 책임을 담당하였다. 1909년에는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이시영(李始榮)·이석영(李石榮)·이회영(李會榮)·이상룡(李相龍)·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촌(遼寧省柳河縣三源堡鄒家村)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1910년 4월에 삼원보에 민간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훈련하였다. 그는 신민회에서 준비하기로 한 학교운영자금 75만원이 도착하지 않고 또한 대흉작이 들어 이곳의 동지들이 봉천(奉天)·노령(露領) 등지로 떠날 때에도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남아 온갖 고생을 견뎌가며 학교를 계속 유지케하였다.
한편 1911년 모종의 밀령(密令)을 띠고 국내에 입국하였다가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사건에 걸려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출옥후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 및 오산학교(五山學校)의 체육을 맡아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후 1914년 다시 남만(南滿)으로 돌아와 이시영·윤기섭·이천민(李天民) 등과 신흥학교의 교관으로서 동교(同校)를 군사전문 교육기관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보병중위 이청천(李靑天), 기병중위 김경천(金擎天), 대한제국육군 보병부위(副尉) 신팔균(申八均), 운남강무당 기병과(雲南講武堂騎兵科)출신 이범석(李範奭) 등과 협력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0년 9월 청산리 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장군 부대가 노령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밀산(密山)에 이르렀으며 홍범도(洪範圖)·이청천의 연합군, 국민회(國民會)의 안무군(安武軍)이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김규식 등과 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의 일부와 광한단(光韓團)·한교회(韓僑會) 등 단체가 통합하여 통일독립운동기관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했을 때 그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2년 6월에는 서로군정서의용군 총지휘관으로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조직하고 통일의 절대 필요성을 주장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동년 8월에 남만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함에 그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부감 김 혁(金赫) 등과 통의부군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 2월 12일에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통의부 대표로 김이제(金利濟)와 함께 참석하여 여러 대표들과 같이 민족의 주권확립,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길림(吉林)에서 통의부·길림민회(吉林民會) 등을 토대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재무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포사회의 치안확보 및 독립군의 국내 진격을 추진하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제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를 공격하자 1932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반만군(抗日反滿軍)과 연합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그는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부사령을 맡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만주가 일본군의 장악하에 들어가자 여러 동지들과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1935년 여름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義烈團)·미주대한인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 등이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김규식·양기탁·이청천·신익희(申翼熙) 등과 협력하여 주요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2월에는 현익철(玄益哲)·양기탁·이복원(李復源) 등과 합의하여 전당비상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적색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켜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이라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이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5-32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4·254·256·262·275·276·321·349·361·366·3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48·49·125·126·172·173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064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7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1·736면 ·독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66․176․300․428․431․434․498․502․627․69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24․325․6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6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33․333․33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