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 5 독립신문과 신한청년보를 상해로부터 입수하여 국내배포에 힘쓰다
3. 1919. 5
4. 1920. 3
5. 1922. 4. 8
6. 1922. 11
7. 1928. 8월에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대동(大同) 서천(西川) 사람이다.
평소 일제의 국권침탈에 극히 분개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 집사(執事)로서 평양지방에서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년 5월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과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상해로부터 입수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한편, 김한진(金漢鎭)·박제택(朴齊擇) 등과 함께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2월(음)에는 김봉규(金琫奎)의 권유를 받고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이 영장(營長)으로 있는 대한광복군총영 중앙기관(大韓光復軍總營 中央機關) 내무부 기밀과장(內務部機密課長)에 임명되어 독립신문등을 한기복(韓基福)·김창빈(金昌彬) 등에게 배포하도록 하였으며, 동년 4월에는 김재덕(金在德)등의 동지를 가입시켜 강서군(江西郡) 일대에서 2천여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오동진(吳東振)에게 송부하였다.
또한 조창룡(趙昌龍)등의 동지로 하여금 성천군(成川郡)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는 한편, 악질 친일분자인 성천구 아파면장(丫波面長) 이관종(李觀鍾)을 처단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창룡은 신계경찰서(新溪警察署) 일경에게 포위되어 격렬한 사격전 끝에 실탄이 떨어져 체포되었으며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또한 동지 조준묵(趙俊默)이 군자금 모집중 체포되자 일단 만주의 관전현 삼도구(寬甸縣三道溝)로 피신하였다.
그후 다시 입국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광복군지단(光復軍支團)을 설치할 계획으로 활동하던 중 1922년 4월 8일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11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89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601·6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91·505·941·950·955면
- 동아일보(1922. 6. 4, 7. 17, 1923. 3. 13, 1928. 8.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