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정문칠은 의병장으로 1909년 1월경부터 경북 영해군(寧海郡)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동년 7월부터 10월까지 영덕(盈德),진보(眞寶),영양군(英陽) 지역에서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12월 21일 영해(寧海) 부근에서 체포된 후 순국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1907년 8월 이후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군경의 무력 탄압은 강화되어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1908년 대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저명한 의병장들은 전사하거나 처형되었다. 경북 북부지역의 일월산과 소백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던 다수의 의병장들도 체포되어 순국하거나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리하여 그 예하 부대장들은 각기 소규모의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을 통해 항전하였다.
정문칠은 1909년 1월경부터 경북 영해군 일대에서 영해 출신의 양반 신동건(申東建) 등과 함께 소규모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였다. 정문칠의진은 영덕을 중심으로 영해,영양,진보 등지 횡횡하며 활동하였다. 1909년 7월 9일 정문칠의진 30명은 영덕군 심곡(深谷)에서 진보군의 헌병과 교전하였다. 또한 1909년 11월 13일 정문칠의진의 의병 13명은 영덕군 북면(北面)을 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이튿날 11월 14일 영덕 보곡동(洑谷洞) 전 면장 신창휴(申昶休)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총살하였다. 그리고 11월 16일 영해군 서면(西面) 창수원(蒼水院)에서 밀정 하대윤(河大潤)을 총살하였다. 1909년 12월 21일 정문칠은 영해 오서면(烏西面)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하다가 체포되었다. 정문칠이 체포된 뒤 그 부대는 경주의 해산군인 출신 신대여(申大汝)가 이끌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大韓每日申報(1910. 1. 7)
- 朴賢燦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1909. 1. 5)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536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제15집 56-57, 238면.
- 梅泉野錄(黃玹) 卷6 51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