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북 고부(古阜) 사람이다.
1908년경 전북 고부에서 의진을 조직하고 의병항쟁에 나섰다.
평소 일제의 국권침탈에 우려를 금치 못하던 그는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광무황제가 강제퇴위하는 국망의 사태가 도래하자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군사를 규합, 거의한 후 의병장으로서 전남북 일대를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성화 의병장은 1908년 3월 수십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북 고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군비에 충당하였다. 6월에는 전북 정읍(井邑)에서 역시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전북 태인(泰仁)·고부·순창(淳昌) 등지에서 활동하며 군세를 확장하였다.
이어 1909년에는 일제 기관을 기습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더라도 이해 1월 6회, 2월에는 9회에 걸쳐 기습작전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그 활동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일제는 이해 2월에만 경찰 단독 5회, 헌병 단독 10회, 수비대 단독 3회 연합토벌 3회 등 총 21회에 걸쳐 출동한 것으로 나타나 이성화의진의 와해를 위해 얼마나 부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09년 4월 그의 부대는 신보현(申甫鉉)의진과 합세하여 순창군 가포곡(加布谷) 일대에서 1시간여에 걸쳐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5월 1일에는 태인군 인곡면(仁谷面)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19일에는 고부군 벌말면(伐末面)에서, 6월 20일에는 고부군 우덕면(優德面)에서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1909년 6월 이성화 의병부대의 활동횟수는 13건이고 7월에는 일경, 헌병, 수비대 등과 무려 26회에 걸쳐 교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최후단계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의병활동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이성화 의병장은 소규모의 의진을 유지하다가 1910년 7월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0. 7. 8. 光州地方裁判所 全州支部)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3輯 418·440·831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8輯 83∼8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卷 801面
- 全北義兵史(全北鄕土文化硏究會, 1992) 下卷 527面
- 全羅北道誌(全羅北道, 1989) 第1卷 855·856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4輯 384面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1卷 83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37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515·623·683·916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83·224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