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전북 흥덕(興德) 출신으로 1909년 3월부터 4월까지 흥덕·고부(高阜) 일대에서 김영백의진(金永伯義陣)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의병장 김영백은 1907년 10월경 전남 장성에서 창의하여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순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4일에는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 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흥덕(興德) 주둔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 기병·헌병·순사의 일본군 연합부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鷔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에는 장성군 북이면 상곡리(上谷里), 2월 중순에는 북일면 동산리(東山里),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 4월 11일에는 일동면 구수교(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鍮店里)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호남 지역의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강화됨에 따라 김영백은 휘하 의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이성실은 1909년부터 4월까지 김영백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1909년 음력 3월 8일부터 음력 4월 30일까지 김영백의 부하가 되어 의병 20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고창·흥덕·장성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항소했지만 1910년 4월 23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권 852~853면
- 判決文(光州地方裁判所 全州支部:1910. 4. 1)
- 判決文(大邱控訴院:1910. 4.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