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정환직(鄭煥直)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윤흥곤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정환직 의진에 투신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기 삼남관찰사를 지낸 중추원 의관을 제수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진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면서 일제 식민기관을 습격 방화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순국한 의병장이다. 윤흥곤은 이 같은 정환직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백 수십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 경북 흥해군(興海郡)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소장 일본인 시원위태랑(市原爲太郞)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돈 3백여 원을 군자금으로 압수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소각시켰다.
아울러 그는 같은 해 11월 3일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기 1백 수십 정을 노획하고 경무분파소 및 순검 박재진(朴在鎭)의 집을 소각하였고, 같은 달 4일에도 의흥군(義興郡)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정을 노획하고 분파소 및 순검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15일 그는 다시 흥해군 읍내로 들어가 순사들을 처단하였으며 군청과 기타 7동의 가옥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16일 경에도 청하군(淸河郡) 읍내에 들어가 순검 김학윤(金學潤)의 의복과 관급품 등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6월 4일 영덕군(盈德郡) 외남면(外南面) 장사리(長砂里)에서 군자금과 의류 등을 거두는 등 의병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10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동지 김수곡(金水谷)·김일원(金日元) 등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523·52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