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894년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우위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개입으로 청으로부터 할양받은 요동을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한국에 접근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개화파를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강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의 민중과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제국주의에 무력으로 항거하였다.
이 시기 오문용은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유인석 의진에 참여하였다. 유인석 의진은 충주성을 점령하면서 사기가 충천하였으나, 그 다음날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6년 3월 초순 충주를 포기하고 다시 제천으로 들어가 적의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중 중요한 것은 수안보 및 가흥(佳興)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에 유인석 의병장은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을 유격장(遊擊將)에 임명하여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수안보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때 그도 수안보 점령작전에 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피아의 요새로 의병의 맹공격으로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강년은 다시 새재[鳥嶺]를 공격하기로 하고 일단 퇴군하였다. 그 후 3월 26일 새재에 당도하여 적의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탄환·유황·조총 등 92점을 노획하여 가지고 동원(東院)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만나 다시 덕주(德周) 근처로 퇴진하였다. 여기에서 이강년은 군사를 거느리고 새재 아래로 왕래하면서 출몰하는 적군들을 공격하여 적의 도량(跳梁)을 방지하는 한편, 종군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위문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리고 4월 초(음력 2월)에는 다시 전군장 홍대석과 약속하여 수안보의 적진을 맡아 공격하고, 자신은 새재의 요해처로 나가 지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홍대석이 약속대로 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충주 장현(獐峴)까지 나왔다가 적의 기습을 만나, 오문용을 비롯하여 추성손(秋聖孫)·김용주(金用胄)·김재관(金在觀)·우재봉(禹在鳳)·박원용(朴元用)·우규하(禹圭夏) 등 의병 10여 명이 전사, 순국하게 되었다.
오문용 등이 전사한 후인 4월 17일에 우선봉 김운선(金雲仙)이 시신을 찾아 돌아오다가 다시 적을 만나 도망하게 되었다. 이 때 간악한 적들은 시신을 칼로 난자하고 게다가 불로 태워서 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도록 하였다.
용감히 싸우다 순국한 오문용 등에 대해 『창의견문록(倡義見聞錄)』에 실린 제문에는 "아! 사람이 세상에 나서 도망하기 어려운 것은 의리다. 그런데 고금을 통해 의리로 싸워 죽은 자가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다. (중략) 슬프다. 이 국적놈들이 화친을 부르짖어 임금님을 위협하고 여러 신하를 우롱하더니, 마침내 국모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임금께서 머리를 깍으시게 되어, 큰 둑이 한 번 무너지매 인류가 금수로 돌아가고, 예악이 분토(糞土)에 빠졌으니 이는 천지간에 처음 있는 큰 변고였다. (중략) 아! 전번 충원(忠原) 싸움에서는 외로운 성과 약한 군사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짐짓 후퇴하여 군기를 수선하고 무력을 단련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틈을 노리던차, 불행히도 너희들이 저놈들의 악독한 칼날을 만나 같은 때에 싸우는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겸하여 불에 타서 형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한 곳에 함께 묻게 되었으니, 그 정경은 참혹하지만 그 의리만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라고 그이 업적을 기리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116·415·423·65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