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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경북도 사람이다.
노·일(露·日)전쟁 후 소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노령으로 망명하여 이범윤(李範允)이 조직한 산포대(山砲隊)에 가입한 후 최재형(崔在亨)·안중근(安重根) 등과 같이 회령(會寧)·부령(富領)·종성(鍾城)·온성(穩城) 등지를 습격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 20일 만주 혼춘(琿春)에서 노종환(盧宗煥)·이명순(李明淳) 등과 함께 5천여명의 교포를 동원하여 3·1독립선언축하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여러차례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4월 29일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영사관은 중국 관헌에게 갖은 외교적 교섭을 벌여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국 관헌은 일제의 요청을 거절하고 곧 석방하였다.
같은 해 북간도 동구 남별리(北間島東溝南別里)에서 대한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 교제과장에 선임되어,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등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혼춘현 춘화향 4도구(春化鄕四道溝)를 중심으로 2백여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박치환(朴致煥)과 함께 건국회(建國會)를 조직하고 25만루불(留)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노령으로부터 3백정의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국내진입 계획을 세웠다. 1919년 7월에는 해삼위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문창범(文昌範)·김 립(金立)·오영선(吳永善) 등 2백여명의 독립운동 대표들과 함께 신한민회(新韓民會)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을 논의하였다. 동년 9월에는 이명순(李明淳)등과 함께 북간도 대표자 회의를 사도구(四道溝)에서 개최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1920년 1월에 혼춘에서 의용군 1,300여명을 무장시켜 군무장(軍務長)으로서 국내공격을 지휘하였으며, 혼춘의 연통랍자(煙筒笠子)에 조선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통합하여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청산리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20년 2월부터는 의용군 1,300여명을 무장시켜 경원(慶源)·온성(穩城) 등 국경지방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합마당 상촌(蛤 塘上村)에서 홍범도(洪範圖)·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 등 독립군 대표들과 만나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국민의회지부를 개칭한 혼춘 한민회(韓民會)의 경호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과로로 인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1920년 6월 1일 이역땅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696·76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759·765·766·767·776·797·798·802·811·822·828·829·103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18·19·20·22·29·30·31·33·34·38·41·45·54·56·58·64·65·67·68·70·73·75·79·92·94·124·125·126·127·129·130·131·134·135·136·137·141·151·152·158·163·170·177·179·425·427·438·439·447·458·479·481·482·877·878·87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08·709·710·711·712·713·7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5·188·237·664·66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10·63·278·3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