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신지수는 1895년 12월 유인석의진(柳麟錫義陣)의 후군장으로 활약했다. 1896년 4월부터 7월까지 충북 충주·단양·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유인석은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1896년 1월 12일 문인 이필희(李弼熙)·서상열(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일으킨 지평의진(砥平義陣)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1896년 1월 28일 연합의병부대 제천의진(堤川義陣)을 결성하였다. 제천의진은 중군 이춘영부대와 선봉장 김백선부대, 그리고 유격장 이강년부대로 구성되었다. 호좌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강원도 3도가 접경하는 충주·단양·원주·영월·안동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신지수는 안승우와 함께 1896년 1월 12일 결성된 지평의진에 참여하여 1월 28일 결성된 제천의진의 후군장이 되었다. 2월 16일 제천의진은 충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2월 26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던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고, 이어 2월 28일 충주성 공방전에서 주용규가 전사함으로써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후군장 신지수는 무기와 전술이 뛰어난 적을 맞이하여 한 곳만 지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므로 유격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충주성에서 퇴각한 제천의진은 제천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때 신지수는 강령수성장(江寧守城將)으로 충주 강령(江寧)을 방어하였다. 3월 18일 제천의진은 일본군 가흥수비대와 교전하였는데, 신지수는 강령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3월 22일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이 제천으로 들어왔으나 신지수가 지키는 강령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 후 신지수는 5월 4일 하소진(荷沼津)에서 관군을 격파하였고, 5월 18일에는 원규상·이인영부대와 함께 가흥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6월 4일 유인석은 서행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는데, 후군장 신지수는 유인석의 본대를 호위하였다. 8월 24일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신지수는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중국의 도움을 청하러 심양에 파견되기도 했다. 뒤에 개화파 정부에 의해 충청도 어사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유인석의 질책을 받고 사죄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騎驢隨筆(宋相燾) 29면
- 昭義新編(金華埴·白三圭·金瀅) 外篇 24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175~176, 194~195, 263~264, 271면
- 關東倡義錄(閔龍鎬) 제4권 1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집 36·40·60·183·366·394·417·422·423·448·459·478·487·494·54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