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충북 청풍(淸風) 출신으로 1907년 8월 이중봉의진(李重鳳義陣)의 종사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곧이어 이중봉과 함께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에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중봉은 충북 체천 출신으로 1895년 12월 예안(禮安)에서 이만응(李晩應)·금봉술(琴鳳述)·이만윤(李晩允)·김도현(金道鉉) 등과 함께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통문(通文)을 각처에 발송한 바 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양재건(梁在健)·이해수(李海秀) 등과 함께 전북 순창(淳昌)에서 거병하였다. 곧이어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여 1907년 8월 8일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벌인 문경의 적성전투(赤城戰鬪)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동년 9월 6일 총독장 이만원(李晩源), 선봉장 권용일(權用佾)과 함께 연풍전투(延豊戰鬪)에거 일본군 4명을 사살하고 3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동년 10월 상곡전투(上谷戰鬪)에서 붙잡혀 종신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백낙천은 1907년 8월 이중봉의진의 종사로 활동했다. 그 후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여 이해수와 함께 1908년 1월 30일 이명상(李明相)·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 5일 충북 충주(忠州)에서 이해수·이명상(李明相) 등과 함께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헌병분견소에 의해 체포되었다.
백낙천은 소위 강도(强盜) 및 폭동죄(暴動罪)로 기소되어 1909년 2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고, 동년 2월 27일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刑事控訴事件簿
- 大韓每日申報(1909. 2. 26)·梅泉野錄(黃玹, 卷之六)
- 皇城新聞(1909. 2.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