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흥해(興海) 사람이다.
정용기(鄭鏞基)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흥해·영주군(榮州)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박치윤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정용기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을사륵약」 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은 경북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고 각계의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용기는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박치윤은 이같은 정용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1907년 음력 8월 14일부터 경북 흥해군 및 영주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9월 3일 영주군 입암동(立岩洞)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7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8월 31일 대심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75·501·502·508·50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