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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786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韓相浩
이명 韓相鎬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가족관계창설일 2022-07-28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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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3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3.1운동후 간도(間島)에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참여(參與)
2. 조선은행(朝鮮銀行) 회령지점(會寧支店)에서 간도 독립운동 탄압조(間島獨立運動彈壓條)간도(間島) 일영사관(日領事館)에 보내는 현금 15만원(万円) 탈취(奪取) 해삼위(海蔘威)에서 무기 구입중(武器購入中) 왜헌(倭憲)피검(被檢)
3. 1921년 8월 25 서울복심원(覆審院)에서 사형 확정(死刑確定) 전기일(前記日)처형(處刑)되다
독립운사(獨立運史)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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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일찍이 간도로 건너가 명동(明東)중학교를 졸업하고 와룡(臥龍)소학교 교사로서 재만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등과 함께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당시 남만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1920년 1월 그는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등과 함께 조선은행 회령(會寧) 지점에서 용정(龍井)으로 운반 중인 현금 15만원을 화룡현 동양리(和龍縣東陽里)에서 호송 일경을 사살하고 탈취하였다.그는 동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海蔘威) 신한촌(新韓村)으로 들어가서 무기 구입, 무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하였다. 1920년 12월 그는 일본 경찰의 주구인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임국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서 일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 당시에는 일군이 소위 시베리아에 출병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일본의 헌병이 노령(露領)에도 있었다. 그는 일본헌병대에서 모진 악형을 당하다가 청진(淸津)으로 압송되었으며,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지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교수형으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7·4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21·624·627∼636·6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97∼300면
  • 기려수필 307·30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한상호 - 함북 경성 용정 15만원 탈취 사건
본문
1900년 2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주을온면(朱乙溫面) 약수동(藥水洞)에서 태어났다. 만주로 건너간 후에는 옌지현(延吉縣) 길인향(吉仁鄕) 와룡동(臥龍洞)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 교사로서 재만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대 중반 열혈청년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을 조직하였다. 철혈광복단은 1919년 3월 13일 룽징(龍井) 만세시위를 이끌었고, 그해 7월 북간도의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는 등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철혈광복단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남만주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특파원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비밀 편지를 받고 기독교 병원 뒤에 위치한 공동묘지에서 윤준희·임국정 두 명과 만났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같은 해 12월에 조선은행 회령(會寧)지점에서 거액의 현금이 다음 해인 1920년 1월경 용정으로 송금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1920년 1월 특파대장 윤준희, 특파원 임국정·최이붕 등과 함께 자금을 탈취하여 독립군 양성과 무기 구입자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월 2일 동지이며 조선은행 룽징출장소 직원인 전홍섭(全弘燮)으로부터 이 달 4, 5일경 현금 15만원이 룽징으로 송금될 거라는 연락을 받은 후 박세웅(朴世雄)·김준(金俊)을 새로이 포섭하여 계획을 실행해나갔다. 같은 달 4일 6명의 대원을 2개 조로 나누어 허룽현(和龍縣) 동양리(東陽里)에 매복하였다. 현금을 싣고 다가오는 호송순사 구니토모(國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豐)을 사살하고 현금을 탈취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에 「용정 15만원 탈취 사건」으로 불렸다. 1월 10일 동지들과 자금을 나누어 소지한 두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였다. 탈취한 자금으로 당시 그곳에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군대로부터 무기를 다량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하였다. 북로군정서에서는 이 무기를 공급받아 독립군을 신무기로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후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된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임국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일제헌병대에서 모진 악형을 당하다가 청진(淸津)으로 압송되었다. 청진지방법원과 서울복심법원을 거쳐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살인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사형을 받았다. 그해 8월 25일 서대문감옥에서 동지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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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강도살인, 정치범죄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1-04-0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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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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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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