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았다. 1925년에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 대학원에 수학하는 중에 「조선민족갱생(更生)의 도(道)」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한국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가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다가 1938년 2월에 안재홍(安在鴻)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독립사상 고취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그 사이에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에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흥업구락부 운동으로 실직된 기간에 한글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에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완성해서 간행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16일 징역 4년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했으나 실질적으로 3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교수와 부총장, 학술원 회원, 학술원 부회장 겸 종신회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 연구와 한글 전용운동에 전념했으며, 한글 가로글씨의 실험과 한글기계화 운동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388·400·462·470·499·501·513·969·993·997·999·1006·1011·1013·1015·101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동아일보(1982. 9. 6 ; 1945. 8. 13 고등법원판결문)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83·1115면
- 동아일보(1927. 2. 21)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298·410·85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