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원주(原州)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강원도 인제(麟蹄)·삼척(三陟)·강릉(江陵)·홍천(洪川)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한말 의병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특히 1909년 9월부터 10일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쇠퇴하여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국권회복 의지에 불타는 의병부대의 일부는 만주 노령으로 이주하여 의진을 재편한 후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의진을 해산하고 잠적하는 의병부대가 있는가 하면 일부는 포천(抱川) 연천(漣川)을 비롯한 추가령지구대, 태백산 소백산 등 산간 지대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여 갔다.
이같은 시기인 1914년 봄 김종근은 해산의병을 재규합하여 의진을 조직한 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용해준(龍海俊)·오중수(吳重守) 등 부하 의병들을 이끌고 1914년 5월 5일 강원도 횡성군 청일(晴日)면 율실리(栗實里)의 정진옥(鄭眞玉) 집과 같은 면 봉명리(鳳鳴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에도 그는 용해준 및 정욱영(鄭旭永) 등 부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군 서석(瑞石)면 검산리(儉山里)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2일 그는 용해준·정태용(鄭泰用)·김원실(金元實)·이낙여(李洛汝) 등 부하 의병을 거느리고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泳歸美)면 개운리(開雲里)에서, 이듬해 1월 19일 용해준·이낙여·장명수(張命壽) 등과 함께 홍천군 서석면 어론리(魚論里)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다. 특히 같은 해 2월 1일 그는 장명수·용해준·최순실(崔順實) 및 장재선(張在善) 등 부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평창(平昌)군 대화(大和)면 계촌리(桂村里)에 들어가 평창군 서기 이근세(李根世), 대화면 서기 김관경(金館卿), 계촌리 이장 김찬경(金瓚卿) 등 수명의 부일배들을 구타 응징한 후 군자금품을 거두었다. 그리고 2월 3일 횡성군 정곡(井谷)면 산전리(山田里)에서도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한편 그는 1907년 8월경부터 박화엄(朴化嚴) 의진에서 활약하였던 김종철(金鍾鐵)을 1915년 3월 인제에서 만나 의진을 확대하고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한 후, 같은 해 5월 8일 김종철의 지휘에 아래 장명수·김원실(金元實) 및 정대성 등 부하 의병들을 이끌고 홍천군 두촌(斗村)면 자은리(自隱里)에서 군자금품을 징발하였다. 특히 그는 6월 6일 김종철 의병장 및 부하 의병들과 함께 강릉군 연곡(連谷)면 장천리(長川里)에서 자신들의 의병활동을 순사주재소에 밀고한 부일배 박군팔(朴君八)을 총살, 처단하였다. 이밖에도 같은 해 8월 11일에는 연곡면 송천리(松川里) 이치령(泥峙嶺)에서 군자금을 징수하는 등 의병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6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1917년 4월 19일 서대문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290∼300면
- 조선총독부관보(1917. 4.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