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고향의 오암서원(梧岩書院)에서 7년동안 한학을 공부하고 숭실중학교·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숭실전문학교에 재학중 김화촌(金花村)과 함께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다 일경에 붙잡혀 여러차례 구금당하였다.
3학년때에는 상해(上海)에 거주하는 김홍서(金弘敍)와 비밀문서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졸업후 그는 평양의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와 숭실중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일경의 비인도적인 태형을 받았다.
그는 1919년 전남 광주의 숭일중학교(崇一中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항일연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후에도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 단원 최양옥(崔養玉)·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와 함께 대동단(大同團) 단원 전 협(全協)과 연락을 취하며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옥후 해외로 망명한 그는 김석우(金錫雨) 등과 함께 해삼위(海蔘威)에서 남석동(南石洞)이란 한인부락을 건설하여 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독립운동 기반확충에 힘썼다.
그후 그는 중국 산서성(山西省)에서 최양옥·신덕영·안창남(安昌男) 등과 더불어 항일결사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일제 밀정에 붙잡혀 천진감옥에서 2년 6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출옥한 그는 공명단원들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북만주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연락을 위해 공명단 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9년 4월 최양옥·이선구(李善九)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동년 4월 4일 평북 용천군에 거주하는 김인옥(金仁玉)으로부터 군자금 160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4월 20일 서울 교외 망우리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탈취하고 동포들의 우편물을 제외한 일본인 우편물을 소각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본군 19사단의 지원까지 받고 경기·황해·강원·충북·충남 등 5도에서 차출된 일경의 추적을 받은 그는 양주군(楊州郡) 백봉산(白峯山)에서 일경과 교전 끝에 붙잡혔다.
그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평북 의주군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화전민 생활을 했는데 소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매년 12월이면 예비검속되어 이듬해 1월에야 석방되었으므로 무랍인(無臘人)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0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0·231·38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14면

